국립극단이 오랜만에 대작을 내놨다. ‘현존하는 미국 최고의 극작가’로 불리는 토니 쿠쉬너의 퓰리처상 수상작으로, 1990년대 영미권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다. ‘파트1’과 ‘파트2’의 공연 시간이 총 8시간에 달하는데, ‘파트1: 밀레니엄이 다가온다’가 지난달 26일 먼저 선보였고, ‘파트 2’는 내년 2월 공개될 예정이다. 턴테이블과 와이어액션 등 뮤지컬급 스케일의 무대 장치부터 공들인 흔적이 역력하고, 연출은 ‘그을린 사랑’ 등으로 요즘 연극계에서 가장 핫한 신유청이 맡았다.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스타 배우 정경호의 연극 데뷔작으로도 화제다. 영상의 시대 한복판에서 희곡부터 연출, 배우, 무대까지 모든 것을 최상급으로 끌어올려 연극의 존재감을 호소하고 나선 것이다. 티켓 발매 당일 전회차 전석 매진될 만큼 대중의 관심도 높다.
평범한 연극은 아니다. 1991년 초연 이래 올리비에상, 토니상, 드라마데스크상 등을 수상하며 현대 연극사에 한 획을 그었고, 연극을 넘어 문화계 전반으로 확장되며 파괴력을 과시했다. 2003년 알 파치노와 메릴 스트립, 엠마 톰슨 주연의 HBO 드라마로 제작돼 골든 글로브상과 에미상을 받고, 2004년에는 오페라 버전이 파리 샤틀레 극장에서 공연되기도 했다.
대체 무슨 내용일까. 에이즈가 창궐하던 1980년대 미국에서 동성애혐오증에 시달리던 에이즈 환자들과 그 주변인들의 이야기다. 유대인 청년 루이스는 동성 애인 프라이어가 에이즈에 걸리자 도망 나와 몰몬교도인 법무관 조에게 다가간다. 평생 보수적인 종교관에 갇혀 살던 조는 루이스를 만난 후 커밍아웃을 하고, 극보수의 상징이면서 동성애자인 변호사 로이 콘은 자신의 에이즈 감염을 숨기고 간암 환자 행세를 한다. 마치 대하드라마처럼 긴 호흡으로 동성애와 에이즈를 둘러싼 인간군상이 펼쳐지다가 프라이어 앞에 천사가 나타나며 ‘파트 1’의 막이 내린다.
요즘 최고 화제인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종교가 재단하는 사회적 질서와 개인의 자유, 인간의 죄와 죄의식에 대한 질문이란 점에서다. 물론 ‘지옥’의 마라맛에 길들여진 입맛으로 ‘엔젤스’를 소화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1980년대와 2020년대라는 시대적 차이, OTT와 연극 무대라는 매체의 질감 차이만큼이나 템포와 호흡은 극과 극이다.
‘지옥’이 던지는 질문도 비슷하다. 2022년 서울 한복판, 대낮에 괴물들이 나타나 사람을 처참하게 불태워 죽이자 사람들은 혼란에 빠지고, 신흥종교 ‘새진리회’의 교주 정진수는 이를 신이 죄인을 단죄하는 지옥의 ‘시연’이라고 주장한다. 아버지가 다른 두 아이를 낳은 미혼모 박정자에게 시연을 고지하는 ‘천사’가 나타나고 시연이 생중계되자 ‘새진리회’의 주장은 진리가 된다. 누군가 ‘천사’의 고지를 받은 것이 알려지면 죄인으로 낙인찍히고, 사람들은 수치를 모면하기 위해 발버둥친다.
“반갑다, 예언자여. 이제 뜻이 이루어지이다. 여기 메신저가 왔다.” 파트1의 마지막, 천사의 대사다. 내년 2월 선보일 ‘파트2’에서는 밀레니엄을 맞은 인물들이 변화의 가능성을 확신하고 용서와 화합으로 향한다고 한다. ‘파트2’의 제목은 ‘페레스트로이카’다.
유주현 기자/중앙 컬처&라이프스타일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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