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세우스 ‘빨간 물’ 덕에 험난한 모험 마치고 귀향했다

중앙일보

입력 2021.11.27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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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글와글 

요한 하인리히 빌헬름 티쉬바인의 ‘오디세우스와 아내 페넬로페의 상봉’.

무료하고 건조한 삶에 어느 날 와인이 찾아왔다. 내가 ‘빨간 물’이라 부르는 오묘한 액체다. 어떤 이들에게는 부와 사회적 우월함의 표식이라지만 내게 있어 그 빨간 물은 갈증을 의미하였다. 구체적으로는 인문학에 대한 지적 호기심, 연결(connect)과 나눔, 글을 쓰는 삶에 대한 열정 같은 것을 두루 말한다.
 
빨간 물은 평소 읽기 힘든 서양의 고전에 도전하도록 용기를 주는 묘약이었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다. ‘일리아드’와 함께 현존하는 서양 최초의 문학작품이며 유럽 인문학의 뿌리라 할 수 있지만, 막상 접해 보면 읽기가 만만치 않은 고전 가운데 하나다. 아직 문자가 자리 잡기 이전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구송시(oral poetry)의 형태로 생긴 것이어서 같은 문장이나 자구의 반복이 계속되어 지루하게 느껴질 소지도 크다. 그런데 빨간 물의 관점에서 읽어 보면 완전히 새롭다.
 
주인공 오디세우스의 모험과 복수, 여기에 아들 텔레마코스가 아버지 오디세우스를 찾아 나선 이 대서사는 트로이아가 함락된 뒤 10년이 지난 시점에서 시작한다. 시인 호메로스가 묘사하는 바다는 언제나 ‘포도줏빛 바다’, 새벽은 ‘장밋빛 손가락을 가진 새벽’이다. 포도와 포도주는 그리스, 더 나아가 지중해 문화권에서 매우 중요하다. 유심히 읽다 보면 작품에서 먹고 마시는 이야기가 줄곧 강조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중에서도 빨간 물 와인이 핵심 장치다. 텔레마코스가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의 행방을 찾아 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아버지의 광으로 내려가는 모습이 이를 상징한다.
 

와글와글 삽화

“그곳에는 황금과 청동이 무더기로 쌓여 있고 궤짝에는 옷이 들어 있었으며 향기로운 올리브유도 많이 있었다. 그곳에는 또 오래된 달콤한 포도주가 든 독들도 있었다. 물을 타지 않은 신성한 음료가 가득 든 이 독들은 나란히 벽에 기대 서 있었는데, 이는 언젠가 오디세우스가 천신만고 끝에 집에 돌아올 때를 대비한 것이었다.”


텔레마코스는 가장 좋은 포도주는 아버지를 위해 남겨두고 자기는 그다음으로 좋은 것을 손잡이 둘 달린 항아리에 담아 가져간다. 괴테가 로마 시절 매우 친하게 지냈던 스위스 출신의 여류화가 앙겔리카 카우프만의 그림 ‘텔레마코스의 귀환’의 모티브로도 유명한 장면이다. 주인공 오디세우스가 스케리아를 떠나 고향으로 향할 때 배로 가져가는 것은 빵과 포도주였고, 7년 동안 오디세우스를 억류해 놓고 남편이 되어 주기를 간청했던 바다의 요정 칼립소가 마침내 그를 놓아줄 때 그리고 마술에 능한 요정 키르케가 오디세우스에게 챙겨 주었던 것 역시 빵과 포도주였다. 이후 서양 문학에서 ‘빵과 포도주’는 길을 떠나는 여행자의 동반자로 표현되고는 하였다. 작품 후반 오디세우스가 ‘인간을 가장 괴롭히는 것은 위장(胃腸)’이라고 고백하는 것처럼 인간이란 존재는 어쩔 수 없이 먹고 마시는 문제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일까. 오디세우스가 ‘가히 신(神)적인 음료’라 표현하던 제사장 마론에게서 받은 트라케 지역 포도주를 즐기는 광경에서 독특한 와인 음용법이 등장한다.
 
“그들이 꿀처럼 달콤한 불그레한 그 포도주를 마실 때면 그는 그것을 한 잔 가득 채워 스무 홉의 물에다 붓곤 했소. 그러면 희석용 동이에서 신기하고 달콤한 향이 올라왔고 그때는 절제한다는 것이 그대에게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닐 것이오.”
 
현대인들과 달리 고대 그리스인들은 포도주에 물을 타서 마셨다는 것을 이 묘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포도주와 물의 비율은 초기에 1대3, 후기에는 2대3이었다고 하는데 이 문장에서 그 비율을 1대20으로 했다 함은 트라케 지역의 포도주가 그만큼 도수가 강했다는 의미다. 포도주는 육체의 갈증과 배고픔을 상징하는 것이면서 죽은 사자(死者)의 영혼을 달래기 위한 제사용 술로도 쓰인다. ‘일리아드’의 영웅 아킬레우스의 시신을 영원히 떠나보낼 때 등장한 포도주가 바로 그런 경우다. “소와 양을 제물로 바쳤고 시신은 연고와 꿀에 잠긴 채 불태워졌다. 다음날 남은 뼈를 수습해 물 타지 않은 포도주와 연고 속에 넣었다.”
 
오디세우스를 가리켜 꾀와 지략에 능한 인물이라 하는데, 와인은 운명을 바꾸는 지혜의 모티브로도 활용된다. 거인 괴물 퀴클롭스들의 나라에서 탈출하기 위해서 오디세우스는 마론에게 받은 도수가 강한 포도주가 가득 들어있는 염소 가죽 부대 하나를 가지고 간 뒤 세 번이나 퀴클롭스에게 포도주를 마시게 하여 마침내 그가 취하여 쓰러져 토하게 만든다. 서양 문학사 최초의 음주 구토 장면이다.
 
이처럼 우여곡절 끝에 고향을 떠난 지 20년 만에 오디세우스가 이타카에 있는 집에 돌아왔을 때 아름다운 부인 페넬로페를 둘러싸고 108명의 구혼자가 몰려들어 날마다 소와 양, 살찐 염소들을 잡아먹으며 오디세우스 집안의 포도주를 마구 마셔 대고 있었다. 그의 부재중에 악당들이 집안 재산을 약탈하였지만, 그가 애지중지하던 포도주가 보관된 광에는 두 짝으로 된 튼튼한 문이 달려 있고 자물쇠로 잠겨져 있으며 그 앞에는 충직하고 경험 많은 가정부 에우뤼클레이아가 주인이 도착할 때까지 지키고 있었다. 질 좋은 포도주는 적들에게 둘러싸인 부인 페넬로페, 오래된 올리브 나무와 함께 결코 빼앗겨서는 안 되는 오디세우스의 정체성을 상징한다. 무수한 고난과 유혹에도 불구하고 귀향해야 할 이유였다. 오디세이아를 통해 서양 인문학은 ‘여행’과 ‘바다’라는 두 가지 비유를 얻게 된다. 거친 파도를 헤쳐나가며 또 다른 세상을 향해 항해하는 모습은 꿈을 꾸는 여행자라면 피할 수 없는 과정이다. 기업인, 직장인, 직업이 무엇이건 현대인들도 마찬가지다. 빨간 물은 그 항해 과정에 말 없는 친구처럼 묵묵히 동행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