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수박장사, 날품팔이, 다방DJ…몸으로 때운 알바 시절

중앙일보

입력 2021.11.1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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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백만기의 은퇴생활백서(99)

 
최근 구인공고가 늘었음에도 아르바이트생을 구하기 어렵다는 보도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이유는 굳이 아르바이트가 아니더라도 청년들이 생활비를 마련할 길이 다양해졌기 때문이랍니다. 구직 전문 플랫폼 알바천국이 올해 1월부터 8월까지 분석한 바에 의하면 구인공고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4.2% 늘었습니다. 반면 같은 기간 아르바이트에 지원한 건수는 전년 동기보다 8.4% 감소했습니다. 아르바이트생을 찾는 업자는 늘었는데 여기에 지원하는 사람 수는 오히려 줄었다는 의미입니다.

 
경제가 발전해서인지 아르바이트의 종류도 참 많아졌습니다. 기사를 보니 대학에 다닐 때 이것저것 아르바이트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아르바이트의 종류가 많지 않았습니다. 제일 흔한 것은 가정교사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특히 지방에서 올라온 학생들은 입주 가정교사를 선호했습니다. 남의 가정에 입주해 그 집 아이들을 가르치는 겁니다. 저도 그런 경험이 있는데 그것도 해보니 마음 편한 일은 아닙니다. 당시만 해도 가정교사를 둔다면 꽤 여유가 있는 집안인데, 그 집에서는 제가 마치 이방인처럼 생각되었습니다.
 

아르바이트의 종류는 과거에 비해 매우 다양해졌다. 일은 고되지만 아르바이트 경험은 사회에서 중책을 수행하는데 좋은 밑거름이 된다. [사진 Wikimedia Commons Ramon FVelasquez]

 
건설공사장에서 일용근로자로 일한 적도 있습니다. 그때는 레미콘 차량이 없어 모래와 자갈을 직접 인부가 등에 지고 계단을 통해 건물 옥상으로 날랐거든요. 일당은 자갈을 지는 인부가 더 많이 받았지만 그게 엄청 힘이 드는 걸 알기에 경험이 많은 사람은 모래를 선호했습니다. 그런 것도 모르고 일당을 더 준다기에 자갈을 지었다가 진땀을 흘렸습니다. 동료 한 사람은 계단을 오르다가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해 아래로 떨어진 사고도 있으니까요.
 
여름방학을 이용해 잠시 수박 장사도 했습니다. 어느 날 손수레를 한 대 샀습니다. 그리고 청과물 도매시장이 있는 청량리에서 수박을 받아다가 동네에서 팔았습니다. 동네 골목을 다니며 “수박 사려!”를 외치는데 길 가던 아주머니가 저를 불렀습니다. 수박을 하나 사며 “총각, 수박을 팔려면 목소리를 크게 해야지 그렇게 적게 해선 누가 듣겠어?”라고 핀잔 겸 격려를 해줍니다. 저는 크게 한다고 했는데도 겸연쩍어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못했나 봅니다.


수박을 도매금으로 사서 소매가로 팔려면 당연히 가격을 높이 붙여야 합니다. 그러나 제가 마치 폭리를 취하는 거 같아 그것도 마음이 편치 못했습니다. 장사는 저의 적성에 맞지 않는 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쨌든 방학 동안 수박을 팔았는데 노력만큼 돈은 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경험을 통해 돈보다 더 중요한 교훈을 얻었습니다. 돈을 번다는 게 쉽지 않다는 깨달음과 자영업을 하는 사람들의 어려움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언젠가 박수근 화백의 전기를 읽는데 그분이 동네 과일 행상에게 사과를 살 때 한 사람에게 다 사지 않고 여러 사람에게 조금씩 나누어 샀다고 합니다. 한 사람에게만 사면 그 옆에 있는 사람이 서운해할까 봐 그랬던 겁니다. 직접 과일 행상을 해봐서 박 화백의 그 여린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즘도 가끔 수박을 먹을 적에 문득 제게 목소리를 높이라던 동네 아주머니가 생각나 혼자 미소 지을 때가 있습니다. 아이들은 왜 아버지가 수박을 먹으며 웃는지 잘 모를 겁니다. 부끄러운 기억이지만 지나고 보니 즐거운 추억이 되었습니다.
 

음악다방 DJ시절 사람들의 희망곡을 틀어주며 재밌는 시간을 보냈다. 신청곡을 음반에서 골라 사연과 함께 음악을 들려주는 일이다.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사진 pxhere]

 
음악다방에서 DJ를 했던 경험도 있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음악을 좋아해 대학 다닐 때 당시 유행하던 음악을 즐겨 들었습니다. 노트에 가사를 옮겨적고 여백에 노래의 에피소드도 메모하곤 했습니다. 어느 날 지인 한 사람이 제게 음악다방 DJ를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하더군요. 당시에는 음악다방 DJ가 꽤 인기가 있었던 터라 좋다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소개해준 다방에 가서 곧바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습니다. 손님이 메모에 듣고 싶은 곡을 신청하면 비치되어 있는 음반에서 곡을 골라 사연과 함께 음악을 들려주는 일입니다.
 
한동안 사람들의 희망곡을 틀어주며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남들 보기에는 어떨지 몰라도 그것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조그만 공간에 들어가 종일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식사도 대충 먹어야 했습니다. 또 통금이 있었던 때라 밤늦게 허겁지겁 집에 돌아갔습니다. 그러니 학교 공부는 뒷전이었습니다. 얼마 후 다방을 그만두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험이 은퇴 후 활동에 도움이 된 적이 있습니다.
 
직장에 사표를 내고 지역사회에 이바지할 일을 찾다가 분당 FM이란 지역방송에서 방송진행자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았습니다. 일정을 메모했다가 얼마 후 서류를 작성해 지원했습니다. 인터뷰하는 날입니다. 방송국 대표가 과거 방송을 해본 경험이 있냐고 물었습니다. 당시 지원자들은 거의 그런 경험자였나 봅니다. 저는 방송 경험은 없는데 대학 다닐 때 음악다방에서 DJ를 했던 적은 있다고 답했습니다. 그랬더니 껄껄 웃으며 “그때 DJ가 인기가 있었지요” 하며 저를 선발했습니다.
 
지역방송국에서 4년여 방송을 진행했습니다. 처음 2년간은 문화계 인사나 주민을 초청해 대담을 나누는 프로그램을 진행했고 나머지 2년은 양서를 골라 책을 읽어주는 프로그램을 맡았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눈이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인에게 책을 읽어주는 점자도서관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저는 그 일이 더 급하다고 생각해 방송국에 사표를 내고 그곳을 찾아갔습니다. 그때부터 눈이 불편한 시각장애인의 눈이 되어 그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명절날에 복조리를 만들어 팔기도 하고, 도서 전집류 외판원도 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 아르바이트도 수월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아르바이트하며 모은 돈으로 어렵게 학업을 마쳤습니다. 요즘 학생들의 아르바이트도 쉽지는 않을 겁니다. 어떤 학생은 택배회사에서 짐을 나르는 일을 맡았는데,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라고 하더군요. 그만큼 육체적으로 고된 일입니다. 하지만 지금 노력하고 있는 아르바이트 경험이 앞으로 사회에서 중책을 수행하는데 좋은 밑거름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저의 경험담이니 믿어도 좋습니다. 이 시각에도 여러 곳에서 땀을 흘리고 있을 학생들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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