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은 연성(軟性)의 리더였다. 본인 스스로도 그렇게 평가받길 원했다. 그는 대통령 재임 시절을 회고하면서 “날씨가 가물 때면 언제 비가 오나 하고 밤에 잠을 못 이루며 창을 몇 번이나 열어봤다”고 말하곤 했다. “나를 따르라”는 것이 리더의 전형처럼 여겨지던 시기, 고인은 시대를 앞서갔다는 평가도 있다.
26일 별세한 고(故) 노태우 전 대통령은 대구 팔공산 기슭에서 태어났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첩첩산중에서 ‘유성기’를 가진 집은 우리 집뿐이었다. 아버지 무릎에 앉아 아버지가 틀어주는 유성기 소리를 따라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제일 또렷하다”는 회고처럼 그는 감수성이 예민한 편이었다.
몸 약해 운동보다 합창부 활동
노 전 대통령은 중학교 5학년(현재의 고2)이 되면서 대학 진학을 준비했다. 이듬해 본격적으로 의대 진학을 준비하기로 마음을 굳혔지만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했다. 그의 회고. “학도병으로 종군하거나 소집되는 두 가지 길밖에 없었다.” 고인은 헌병으로 군에 몸을 담았다.
육군사관학교 입학, 하나회 만들어
이렇게 들어간 육사에서 그는 대구·경북 출신 생도들과 두터운 친분을 쌓았다. 64년 3월엔 전두환 전 대통령과 고인이 주축이 돼 ‘하나회’를 꾸렸다. “나라의 기둥은 우리다”가 창설 구호였다. “전두환·김복동 외에 손영길·최성택 등 경남 쪽 친구들까지 가세해 휴가 때마다 함께 어울리곤 해서 다른 생도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쓸데없는 짓이라고 못마땅해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그는 기억했다.
“모든 것을 참자, 기다리자” 인생철학
한국 정치 물줄기 바꾼 3당 합당 … 비자금·내란죄로 구속
87년 3월 전두환 후계자로 지명
그때 나온 게 6·29 선언이었다. 집권여당의 대선후보였던 노 전 대통령으로서는 대통령 자리를 건 모험이었다. 더 나아가 그는 ▶언론의 자유 보장 ▶정당 활동 보장 ▶김대중 사면 복권 등을 약속했다. 6·29 선언은 당시만 해도 오롯이 고인의 결단으로 알려졌었다. 하지만 90년대를 거치며 고인과 전두환 전 대통령의 교감 속에 나왔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다만 누가 주도했느냐를 놓고는 지금도 말이 엇갈린다. 전 전 대통령과 가까운 인사들은 “노 전 대통령은 꺼렸는데, 전 전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권해 성사됐다”고 주장한다. 민정수석을 지낸 김용갑 전 의원은 선언 이틀 전에 전 전 대통령이 주변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기억했다. “그간 먼 길을 돌아왔다. 우린 이번에 직선제를 수용한다. 다만 모든 내용은 노 대표가 직접 선언하는 것으로 모양새를 갖추기로 했다.”
노 전 대통령은 선거 유세에서 “이 사람, 보통사람입니다. 믿어주세요”라고 외쳤다. 당시 주변에선 “선거는 강력하게 와 닿는 이미지를 내세워야 하는데 너무 약해 보인다”고 우려했다고 한다. 하지만 ‘보통사람’이라는 슬로건을 앞세워 1971년 이후 처음 치러진 대통령 직선제에서 그는 약 36%의 득표율로 제13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야권 단일화 실패도 작용했다.
서울올림픽은 노태우 정부의 상징이다. 그는 전두환 정부 시절 정무제2장관으로 올림픽을 유치했고 대통령으로 재임하는 동안 이를 성공적으로 치렀다. 하지만 “군사정권이 올림픽으로 통치를 정당화하려 한다”며 개최지를 바꿔야 한다는 일부 IOC 위원의 주장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는 “개최지가 바뀌면 잠실 메인스타디움 한가운데 사마란치 IOC 위원장과 나머지 81명 IOC 위원의 무덤을 만들어 세계적인 관광지로 개발하겠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결국 서울올림픽은 160개국이 참가하며 냉전시대의 고리를 끊는 등 역대 가장 성공적인 올림픽 중 하나가 됐다.
88년 4·26 총선 참패로 정치적 위기
그 후 JP가 YS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1997년 대선에서 DJ와 JP는 다시 내각제 개헌을 매개로 ‘DJ 대통령-JP 총리’ 시대를 열었다. YS의 측근인 고(故) 이원종 전 청와대 정무수석은 “역사적 가정이지만, 3당 합당이 없었다면 DJP 연합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3당 합당을 앞두고 열린 5공 청문회(1989년 12월)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이 국회에 증언하러 나왔다. 그때 증인석을 향해 명패를 던지며 강렬한 인상을 남긴 이가 노무현 당시 통일민주당 의원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3당 합당에 끝까지 반발하며 소신 있는 정치인이란 평가를 얻었다. 만약 3당 합당이 없었다면 김영삼→김대중→노무현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권력의 변화는 전혀 다른 궤도로 흘러갔을지도 모른다.
1995년 10월 19일, 당시 민주당 박계동 의원은 국회 본회의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이 시중은행 40개 차명계좌에 100억원씩, 모두 4000억원이 예치돼 있다”고 폭로했다. 계좌번호까지 공개했다. 8일 뒤 노 전 대통령은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비자금 조성을 시인하며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했다. “대통령 재직 시 기업인들의 성금으로 약 5000억원의 통치자금을 조성해 1700억원가량이 남았다”는 고백이었다.
12·12 군사반란과 5·18 내란죄 혐의에 대해서도 검찰의 재수사가 시작됐다.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는 95년 11월 노 전 대통령을 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특가법상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했다. 노 전 대통령은 97년 4월 대법원에서 징역 17년, 뇌물 2628억원에 대한 추징을 선고받았다. 97년 대선에서 김대중 국민회의 후보가 당선된 직후인 12월 22일 노 전 대통령은 수감 2년1개월 만에 특별사면됐다. 노 전 대통령은 이후 2013년 9월 추징금 2628억원을 완납했다. 노 전 대통령도 정치자금 수렁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한 측근은 “노 전 대통령이 비자금 사건 이후 마음의 병을 얻어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됐다”고 했다.
한편 노태우 정부는 사회간접자본(SOC)에도 과감하게 투자했다. 인천국제공항, 경부고속철도, 서해고속도로 등이 대표적이다. 주택 200만호 사업도 벌였는데 당시 전국 주택 수 640만가구이던 시절이다. 부동산과 관련, 토지공개념 적용을 위한 3법 즉 택지소유상한제와 토지초과이득세, 개발이익환수제도 도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