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농민 투기 근절 위해 농지 소유주 전수조사 시급”

중앙일보

입력 2021.09.04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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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인터뷰] 임영환 경실련 농업개혁위원

“이 모든 사태는 결국 농지에 대한 무관심에서 시작됐어요. 농지법을 현실에 맞게 고쳐야 한다고 그토록 오랫동안 얘기해 왔건만…. ”
 
최근 여야를 불문하고 정치인들의 부동산 투기 의혹이 잇따라 드러난 데 대해 임영환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농업개혁위원(법무법인 연두 변호사)이 내놓은 냉정한 진단이다. 실제로 국민권익위원회가 발표한 국회의원의 부동산 투기 의심 사례 30건 중 12건이 농지법 위반에 해당됐다. 지난 2월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들의 부동산 투기 의혹도 대부분 개발 호재가 있는 농지의 사전 매입과 관련한 것이었다.
 
헌법 제121조에는 ‘경자유전의 원칙’이 규정돼 있다. 원칙적으로 농사짓는 사람만 농지를 소유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런 가운데 산업화와 도시화로 농민이 갈수록 줄면서 농지를 재산 증식과 투기 수단으로 삼으려는 일부 외지인들의 행보를 둘러싸고 논란이 끊이질 않았다. 농지 소유 문제를 시대의 흐름에 맞게 재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진 이유다.
 

임영환 경실련 농업개혁위원이 농지 투기 근절 방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정준희 인턴기자

임 위원은 10여 년 전부터 경실련 등 시민단체 활동을 통해 농업 문제와 농지법 개혁에 관심을 쏟아온 ‘농지법 전문 변호사’다. 경실련이 지난 7~8월 실시한 국회의원과 광역·기초단체장 농지 수요 실태조사에도 주도적으로 관여했고 지난 7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농지법 개정안의 밑그림을 그리는 데도 적극 참여했다. 임 위원은 “투기만 노리는 ‘가짜 농민’ 대책은 물론 농지를 앞으로 어떻게 보전해 나갈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농지 투기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유는.
“무엇보다 현행 제도가 ‘가짜 농민’을 양산하는 구조로 설계돼 있기 때문이다. 농사를 짓지 않아도 농지를 취득할 수 있는 예외 사례가 계속 늘고 있다. 농업진흥구역의 경우 비농민의 농지 소유가 법적으로 금지돼 있지만 그 외 지역의 농지는 1000㎡(약 300평)까지 주말농장용으로 아무 규제 없이 취득할 수 있다. 문제는 지역 개발에 따른 농지 투기가 대부분 농업진흥구역 밖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누구나 취득할 수 있지만 실제로 농사를 짓는지 안 짓는지에 대한 관리 감독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게 현실이다.”
 
LH 사태를 계기로 농지법이 개정됐는데.
“농지 취득과 관련해 과거보다 꼼꼼하게 서류를 제출하도록 강화한 것은 긍정적이다. 하지만 사후 관리 체계는 여전히 부실한 실정이다. 농지에 대한 전수조사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지금 시행하는 실태조사는 읍사무소 직원이 도면을 들고 현장에 나가 지역주민들 얘기를 들어보며 확인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직원 한 명이 그 많은 땅을 어떻게 다 살펴볼 수 있겠나. 그러니 소유주의 자진 신고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불법과 편법도 제대로 짚지 못하는 것이다.”
 
당장 어떤 부분부터 개선해야 할까.
“농정을 체계적으로 설계하기 위해서는 생산수단인 농지가 얼마만큼 확보돼 있고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파악하는 게 우선이다. 농민이 실제로 농지를 얼마나 소유하고 있고 비농업인은 어떤 방식으로 소유하고 있는지, 그 추이는 어떻게 변하는지 모니터링하는 게 관건이다. 투기꾼을 잡는 건 이 같은 농지 관리 과정에서 나타나는 효과 중 하나다. 하지만 농지 전수조사는 일제 강점기 때 한 차례 실시된 이후 한 번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LH 사태 이후 정치권과 학계에서도 여러 의견과 개선책이 제기되고 있다. “농지 소유 규제를 강화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주장도 그중 하나다. “대통령도 논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게 현행 규제라면 이를 시대 변화에 맞게 합리적으로 조정하는 방향으로 사회적 합의를 모색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에 대해 임 위원은 “비농민이 농지를 소유하는 것 자체만으로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며 “소유를 통해 시세 차익이나 임대 수익을 얻으려고 하니까 문제가 되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특히 농지 임대료가 높아지면 당연히 생산비용도 높아질 것이고 결국 밥상 물가도 영향을 받게 된다. 또 농산물에 대해 제값을 못받게 되면서 결국 농업을 접게 되는 농민도 늘게 된다. 임대료가 뛰어 가게 문을 닫아야 하는 자영업자를 보호하기 위해 임대차보호법이 생겼듯이 농지에 관한 임대차보호법도 함께 강구할 필요가 있다.”
 
1996년 농지법 시행 이전에 취득한 농지나 상속 농지도 규제 예외인데.
“최근엔 상속 농지 문제가 더 부각되고 있다. 현재 국내 전체 농지 중 50~60%가 상속 농지로 추산될 정도로 비중이 커졌다. 농민들의 고령화로 상속 농지가 눈에 띄게 늘고 있지만 도시에 사는 자녀들이 상속받은 땅을 처분하거나 직접 농사를 짓지 않고 ‘일단 소유하고 보자’는 쪽으로 분위기가 흐르다 보니 농업 생산량은 갈수록 줄어들 수밖에 없다.”
 
임 위원은 그러면서 농지의 중요한 가치 중 하나로 ‘식량 안보’에 주목했다. “요즘처럼 먹거리가 풍부한 시대에 아무것도 아닌 얘기로 들릴 수 있지만 국가적 차원에선 여전히 중요한 문제다.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하는 밀의 경우 매년 가격이 널뛰고 있다. 최근엔 코로나19까지 겹치면서 가격이 급등하고 있는 추세다. 전염병 유행처럼 예기치 못한 상황에 대비해 자급자족할 수 있는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선 최소한의 농지 보전이 필수다. 식량 위기는 언제라도 들이닥칠 수 있다.”
 
향후 과제는.
“일단 농지 전수조사가 선행돼야 한다. 이게 바탕이 돼야 전문가들과 정부·국회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현실에 맞는 대책을 강구할 수 있지 않겠나. 그 속에서 지자체들도 각자 특성에 맞게 비농민의 농지 소유 면적을 어느 정도 허용하고 제한할지에 대한 합리적 방안을 마련할 수 있을 거다. 인력과 예산 문제로 당장 시행하기 어렵다면 시범사업 차원에서 몇몇 지역에서 먼저 실시하는 것도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