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독일 ‘유로-리전’ 통해 인접국들과 평화 공존

중앙일보

입력 2021.09.04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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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통일 그 후 30년 〈11〉

오더 강 위의 다리를 검문 없이 건너서 독일과 폴란드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 [사진 베른하르트 젤리거]

독일은 유럽의 중앙에 자리 잡아 동서 유럽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다. 이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유리한 요인이지만 또한 이 때문에 많은 갈등이 생겨나기도 했다. 서쪽의 국경은 특히 프랑스와 분쟁의 소지가 있었으며 동쪽 국경에서는 지난 천 년 동안 계속해서 크고 작은 변동들이 있었다.
 
1·2차 세계대전 결과 독일은 3분의 1에 달하는 영토를 상실했다. 특히 동쪽에서 많이 잃었지만, 북쪽과 서쪽에서도 그랬다. 무엇보다 폴란드와의 경계가 문제가 되었는데 스탈린은 소련이 폴란드로부터 합병한 땅에 대한 보상을 위해 독일과 폴란드 간의 경계를 자기 뜻대로 관철시켰다.
  
1985년 역내 국경 통과 때 검문 사라져
 

국경을 접하고 있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안 데어 오더)와 폴란드 수비체 지역에서는 표지판을 양국어로 동시에 표기하고 있다. [사진 베른하르트 젤리거]

많은 독일 인접국이 두 차례 세계 대전을 일으켰던 독일을 의심의 눈초리로 지켜봤기 때문에 1990년 독일 통일이 환영받은 것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은 그다지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다. 서방 국가인 프랑스와 영국은 동독 시위대가 ‘우리는 한 민족이다’는 구호를 외치며 시작된 독일 통일 논의를 서둘러 종결시키고자 했다. 서독이 기본법에 입각해 오더-나이세 선을 독일의 동쪽 국경으로 최종적으로 인정하는 것을 통일 이후 의회에서 결정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하자 폴란드는 우려를 표명했다.


1990년 10월 3일 독일이 통일되자 덴마크·폴란드·체코(1993년까지는 체코슬로바키아)·오스트리아·스위스·프랑스·룩셈부르크·벨기에·네덜란드 9개의 인접국이 생겨났다. 그러면 통일 독일은 인접국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평화롭게 유지할 수 있었을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통일 이전 수십 년 동안 지속해 왔던 하나의 특별한 방식을 통해 찾을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유로-리전(Euro-Region)’이다.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또한 서로 간에 제약들도 존재했던 곳 중 하나가 독일과 네덜란드 간의 국경 지역이었다. 두 나라는 수백 년간 평화롭게 지냈지만 2차 대전 때 독일은 네덜란드를 침략했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물자와 사람의 왕래가 빠르게 재개되기는 했지만, 전쟁의 상흔은 깊었다.
 
지금으로부터 63년 전인 1958년 네덜란드의 트벤테와 아하터획, 오베리쎌 일부 지역과 드렌테 지역은 독일의 뮌스터란트, 그라프샤프트 벤트하임, 오스나브뤼크와 소위 유로-리전으로 하나의 커뮤니티를 형성했다. 이것이 최초의 유로-리전으로서 이러한 방식의 효시가 되었다.
 

폴란드 쪽에 있는 국경 표시 말뚝. [사진 베른하르트 젤리거]

유로-리전은 국경을 초월한 주민과 기업, 조직 간의 협력을 지원하는 역할을 했다. 또한 독일과 네덜란드 측의 지자체들이 지자체 협회를 결성해 지자체 간의 상호 협력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국경 통행을 수월하게 하는 것과 같은 구체적인 프로젝트들을 수행했으며 나중에는 프로그램들을 더 확대했다. 이후에 관련 사무를 총괄하는 사무국이 설치됐는데 독일과 네덜란드의 국경에서 불과 75m 떨어진 그로나우에 자리를 잡았다. 양 지역 지자체 의회들도 서로 협력했다.
 
‘국경을 넘어선 인력 충원’ 사업은 이 지역의 고용을 지원하고 있으며, ‘국경 없는 관광 혁신’ 사업은 지역 내의 상대 국가에 진출하는 중소 관광업체들을 돕고 있다. ‘탠덤’은 예술, 문화 프로젝트들을 지원한다.
 
현재 해당 유로-리전에 거주하는 주민 총인구는 약 340만 명에 이른다. 129개의 게마인데(기초 지자체 단위)가 속해 있으며 총면적은 1만3000㎢다. 이 유로-리전은 경제위원회와 사회위원회 그리고 지속가능발전위원회의 3개 위원회를 운영하고 있다. 심의회에는 양측 각 42명의 위원이 참여하고 있다.
 
유로-리전에 대한 실질적인 지원은 1989년부터 이뤄졌다. 중동부 유럽의 전환 과정이 진행됐던 시점이다. 유럽공동체(EC, 유럽연합 전신)는 지역 발전을 위한 기금을 활용하여 소위 인터렉-프로그램(Interreg-Program)을 운영했다. 인터렉-프로그램은 현재 연간 100억 유로의 예산을 들여 접경 지역 국가 간의 교류 협력 사업들을 진행하고 있다.
 
중앙 집권 체제가 강한 나라들에서는 인터렉-프로그램이 분권을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 해당 지역들이 유럽연합(EU) 예산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기 때문이다.
 
인터렉-프로그램은 무엇보다 국경이 지니는 단절의 의미를 상쇄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로써 유럽의 지역 및 지자체 차원에서 안정적이며 평화적인 관계가 정착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과거 수백 년간의 모습과는 다르게 현재는 유럽 국가들이 서로 전쟁을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됐는데 이런 변화가 생긴 데에는 지역 협력이 큰 역할을 했다. 1985년 솅겐협약이 발효됨에 따라 역내 국경 통과 시에 검문이 사라짐으로써 접경 지역들은 더욱 확실하게 공동 성장의 길로 들어섰다. 독일은 EU의 확장으로 폴란드, 체코 등 중·동유럽 국가들과의 통행이 자유로워졌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현재 70개 이상의 유로-리전이 존재하며 그중 일부는 EU의 역외 경계에 접해 있는 비회원국들과의 접경 지역을 공유하는 유로-리전이다. 독일의 접경 지역과 지자체들은 총 27개의 유로-리전을 형성하고 있다. 유로-리전 ‘프로 유로파 비아드리나(Pro Europa Viadrina)’는 그중 하나다. 독일의 동쪽 국경 도시인 오더 강변에 위치한 프랑크푸르트시와 폴란드 수비체시가 서로 마주하고 있는 지역이다. 이곳에서는 오더강 위로 놓인 다리만 건너면 두 나라 사이를 오갈 수 있다.
 
유로-리전은 중·동부 유럽에서 사회주의가 무너진 후 이들 국가와의 접경 지역에서도 중요했다. 예를 들어 1990년 이후 3~4년 동안 독일과 체코 접경 지역에서 범죄와 성매매가 큰 문제로 떠오르자 유로-리전들은 특히 양국 간의 경찰 협력을 강화함으로써 문제 해결에 큰 역할을 했다.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청소년 교류다. 독일과 프랑스 간의 화해를 위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수단이 바로 독불 청소년친선협회였다. 지금은 폴란드와도 비슷한 교류 프로젝트가 있으며 공동 교과서 연구 위원회 또한 활동 중이다.
  
한국도 ‘아시아-리전’ 협력체 만들어야
 
인접국과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국인들 입장에서는 매우 친숙하게 들릴 것이다. 역사적으로 적대 관계가 형성되면 대개의 경우에는 협력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 유럽 통합의 창시자들, 지역 차원에서 유로-리전을 만들었던 선각자들, 그리고 독불 화해와 독폴 화해를 구상했던 지도자들은 처음부터 모든 역사적인 문제들을 한꺼번에 해결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들의 시선은 미래를 향했으며 이러한 배경에서 양국 청소년들과 지역 간의 화합을 시도했다.
 
이러한 사례를 참고한다면 아시아에서도 국경을 초월한 협력체인 ‘아시아-리전(Aisa-Region)’을 만들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할 것이다. 현재 한국은 바다와 북한을 경계로 하고 있어 하나의 섬과 같은 환경에 처해 있다. 한국이 바다 경계 너머에 있는 중국, 일본과 함께 이러한 협력체를 구성한다면 동북아시아의 화해를 위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번역 : 김영수 한스 자이델 재단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