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이밍 루트 세터의 세계
지난 21일 경기도 포천시의 소흘체육공원임공암벽. 실외에 있다고 해서 흔히 ‘외벽’이라고 부르는 높이 17m, 폭 20m의 이 구조물에는 90도 벽부터 지상과 평행을 이루는 천장 구간도 있다. 심혜인(41·수리클라이밍클럽)씨는 “문제가, 홀드 간격이 긴데다 마지막에 몸을 날려야 해서 키가 작으면 풀기 힘들다”고 말했다.
천종원(25)과서채현(17·이상 노스페이스클라이밍팀) 선수가 이번 달 초 폐막한 도쿄올림픽 스포츠클라이밍 종목에 출전했다. 정식종목으로 처음 채택된 이번 올림픽에서 비록 메달을 따지 못했지만, 스포츠클라이밍 바람을 다시 일으켰다. 2030을 중심으로 암장 방문이 늘었다.
서울 은평구에서 맑음클라임을 운영하는 한대욱(43) 센터장은 “올림픽 전보다 체험 문의 전화는 3배, 실제 체험 방문은 2배 정도 늘었다”며 “데이트 코스로 노래방 온 듯, 빈손으로 와서 장비(암벽화, 초크)를 대여해 2시간 정도 일일 체험을 하고 가는 20대 커플도 꽤 많아졌다”고 밝혔다.
이런 식으로 최근 스포츠클라이밍을 처음 접한 김모(23·경기도 부천)씨는 “힘으로만 되는 게 아니라, 수능처럼 문제의 경향과 의도를 잘 파악한 뒤 몸을 써야 하더라”고 털어놨다. 심씨에 이어 김씨도 ‘문제’라고 했다.
# “올림픽 문제는 불수능, 협의 모자란 듯”
“저희 같은 루트 세터가 문제를 냅니다.”
한만규(62) 일산클라이밍 센터장은 대한산악연맹(대산련) 공인 루트 세터 1급. 그는 “각종 대회에서, 혹은 전국의 실내외 암장에서 루트 세팅을 한다”며 “대회에서는 선수의 기량에 따라, 일반 암장에서는 회원들의 흥미를 유도하는 방향으로 세팅한다”고 밝혔다. 루트 세팅은 대회와 암장 두 곳에서 행해진다는 말이다. 그는 최근 경기도 광명시 외벽 루트 세팅을 마쳤다. 한 센터장은 전국 공인 루트 세터 51명(1급 28명, 2급 23명) 중 한 명이다.
국제스포츠클라이밍연맹(IFSC) 아시아 루트 세터인 조규복(55) 전 스포츠클라이밍 국가대표팀 감독은 “실내암장에서는 보통 초·중·상급 루트의 비율을 5:3:2로 맞춰야 흥미를 유발할 수 있다”며 “안전은 기본이고, 될 듯 안 될 듯 세상에 둘도 없는 문제를 내는 게 루트 세터의 역할”이라고 설명했다. 루트 세터는 창의력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이 창의력을 바탕으로 루트 세터는 문제를 내는 출제자가 되고 행위를 끌어내는 연출자가 된다.
대회에서 치프 루트 세터(chief route setter)는 세터들이 낸 낸 루트를 점검하고 조정하는 역할을 한다. 이번 도쿄올림픽에서는 국제 루트 세터와 일본 현지 루트 세터들이 협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규복 감독은 “이번 도쿄올림픽에서 서채현 선수가 풀지 못한 본선 볼더링(짧은 벽에서 난도 높은 등반) 문제는 ‘불수능’이라고 할 정도로 너무 어려워, 루트 세터 간 협의가 부족했던 것 아닌가 싶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루트 세터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공정성. 기량이 뛰어난 선수가 승자가 될 수 있도록 루트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제산악연맹(UIAA) 국제 루트 세터인 최석문(48·노스페이스클라이밍팀)씨는 “선수들의 객관적인 기량 순서대로 순위가 매겨지도록 완급을 조절해야 관중도 흥미를 갖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선수나 일반인의 기량을 고려하지 않고 창의력에 쏠린 루트 세팅을 하면 ‘이 문제 누가 낸 거냐’라는 욕을 바가지로 먹을 수 있다”라며 웃었다.
최석문씨는 “홀드를 5도만 틀어도 문제는 5배 어려워질 수도 있다”라며 루트 세팅의 세밀함을 강조하기도 했다.
아예 팀을 결성해 루트 세팅을 하는 이들도 있다. ‘홀드르륵’은 전·현직 스포츠클라이밍 선수들이 모여 결성한 세팅 크루. 최근 대전의 220평(727㎡) 규모 암장을 세팅했다. 9명이 이틀간 100개의 문제를 냈다. 홀드르륵의 김태인(29)씨는 “2년 전 대회 참가비용이라도 우리 손으로 벌어보자는 취지로 세팅 크루를 만들었다”고 밝혔다.
루트 세팅에도 ‘흐름’이 있다. 김병구 대산련 스포츠클라이밍 이사는 “일직선으로 뻗는 사다리꼴의 H라인보다, 몸을 틀어야 하는 S라인으로 루트 세팅을 하는 게 일반적”이라며 “최근 볼륨(삼각·원형 등의 큰 홀드)이 없으면 루트 세팅이 안 될 정도로 사용이 잦아지고 있고, 자연 암벽의 크랙(바위의 갈라진 틈)을 묘사한 부분 등 다양한 문제들이 등장하고 있다”고 밝혔다.
대회장 한 곳, 혹은 암장 한 곳의 홀드는 수백, 수천 개. 루트 세팅의 흐름이 어떻게 바뀌건 그 홀드 하나하나에는 흔들림 없이 서려 있는 세터들의 가치가 있다. 공정과 신뢰라는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