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레이 대항전 ‘영웅’ 선배 쫓아다니며 물주전자 날라

중앙일보

입력 2021.08.21 00:24

수정 2021.09.24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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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남 남기고 싶은 이야기] 예스터데이 〈25〉 단편소설 ‘담박질’

조영남씨의 삽교초등학교 시절 사진. 2학년 때로 기억했다. [사진 조영남]

지난 2월부터 지금까지 중앙SUNDAY에 조영남의 남기고 싶은 이야기 ‘예스터데이’를 잘 연재해왔다. 벌써 반년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 좀 당황스럽다. 지난주 손기정 마라톤 선수에 관해 쓸 때 내가 운동경기 중 육상을 평생 좋아한 이유는 내가 시골 살 때 다른 것 말고 뜀박질만은 우리 학교에서 제일 꼴찌라는 걸 밝히면서 상대적으로 나의 영웅은 육상을 제일 잘하는 선배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 내가 다녔던 삽교초등학교를 소개하고 요즘처럼 학생 수가 형편없이 적어 보일까 봐 전교생 2000명임을 일부러 밝혔다. 앗, 그런데 신문을 받아보니 200명으로 나와 있었다. 나의 영웅이었던 선배가 겨우 200명 중에서 대표 400m 릴레이 선수라면 그렇게 빛나 보일 수가 없다. 나의 손기정 얘기는 스케일이 200명 때문에 급격히 졸아들었다. 나나 신문사나 세밀하게 확인하지 못한 탓이다.
 
첫 이혼 후 방송 못할 때 심심풀이로 써

초등 1년 선배, 공부·달리기 다 1등
원정 경기까지 따라가 열렬히 응원

서울대 법대 갔는데 고시서 쓴잔
30여 년 만에 동네 잔칫집서 재회
“무덤을 잘못 써 아홉 번이나 낙방”

그런데 나는 지난 호에 내가 단편소설을 써본 적이 있다고 은근히 자랑하면서 다음 호에 자세히 설명하겠노라고 약속한 걸 기억하고 있다. 약속은 약속이다. 어떤 경우에도 말이다. 순 아마추어 단편소설 ‘담박질’을 소개하고 그다음 여러분의 판단을 기다려보겠다. 첫 번 이혼 후 그 여파로 약 1년간 방송 출연을 못할 때 시간이 좀 남아 심심풀이로 쓴 소설이다. 200자 원고지 70매짜리다. 나는 띄엄띄엄 소설을 따라가는 방식을 취하겠다. 부끄럽다. 글솜씨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아 그렇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담박질엔 반 전체에서 꼴등이었다. 내가 딴 건 잘하는데 담박질만 꼴찌인 것이다.


6학년 선배 중에 홍수근 형이 있었는데 공부도 1등이고 학생회장이고 전체 대대장이고 무엇보다 그는 우리 초등학교 400m 릴레이 대표선수였다. 그런데 홍수근 형 옆에는 전교 2등이었던 김경식 형이 꼭 붙어 다녔다. 홍수근 김경식 두 선배는 나의 영원한 영웅이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나는 서울음대 2학년 때 ‘딜라일라’라는 노래를 TV에서 불러 일약 인기가수로 성공하고 공연을 하러 다니던 어느 날, 일은 시작된다(나는 옛날 원고를 찾아내어 마구마구 줄여서 써내려간다).  
 
아무래도 하루에 다섯 군데 출연은 무리였다(옛날에는 밤무대가 가수들 생계에 주업이었다). 하지만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두 달 전 예정에도 없던 이혼을 결행했고 빈손으로 집을 나왔고 급한 대로 아파트 전세금이라도 끌어모아야 했다. 저녁 아홉시부터 새벽 한 시 반까지 일수쟁이 일수 도장 찍으러 돌듯 밤업소 무대들을 누비고 다녀야 했다. 돈 생기는 일에 시간 뺏기는 거야 억울할 게 없었지만 전에 없이 목이 아픈 게 문제였다. 하룻밤에 다섯번씩이나 ‘보리밭’을 불러제끼고 나면 웬걸 ‘보리밭’이 진흙탕 밭으로 돼버리곤 했다.
 
하루는 고향 선배를 자처하는 사람이 나를 꼭 만나고 싶어한다고 매니저가 전했다.
 
기다린다는 사람이 누구일까. 아래층 커피숍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주위를 살폈다. 저쪽 구석 테이블에 혼자 앉아 있던 사람과 시선이 마주쳤을 때 나는 덤빌 듯이 달려들었다.
 
“어, 경식이형 아니유?”
 
분명 그였다. 그가 대답을 하기 전에 먼저 내가 말했다.
 
“형이었구려. 내 매니저한테 전화를 그토록 간곡히 했다는 사람이.”
 
수십 년의 세월을 생략한 채 친근하게 대했으니 놀랄 만도 했다.
 
“그려 그려 나였어. 근디 워치기 나를 그렇게 금방 알아본디어. 아이구 30년이 넘었는디 워치기 내 이름까지 알구 말여.”
 
‘워치기’는 어떻게의 충청도 말이다. 얼결에 내 입에서도 고향 말씨가 새어 나왔다.
 
“왜 몰러봐유, 형을.”
 

1968년 트윈폴리오 첫 리사이틀 공연에 찬조 출연했던 조영남씨. 왼쪽이 윤형주씨, 오른쪽이 송창식씨다. [사진 윤형주]

몰라보다니 홍수근, 김경식을, 내 영웅 홍수근과 단짝 김경식을 몰라보다니, 300년 후에 만났어도 나는 맹세코 그들을 단번에 알아봤을 것이다.
 
홍수근. 나보다 한 학년 윗반 홍수근은 나 한 사람의 영웅이 아니었다. 우리 동네 아이들의 전부, 삽교초등학교 전교생과 지서방네 할아버지, 우리집 건넌방의 가짜꿀 만드는 아저씨 부부, 심지어는 우리 학교 선생님들까지 홍수근을 위해주고 떠받들어 주었다.
 
우리 시골학교에서는 뭐니뭐니해도 공부가 최고였다. 공부건 뭐건 홍수근은 전교 최고였다(잠깐 스톱! 막 전화 끊었다. 대한민국 고위직 공무원의 전화였다. 오래전에 만나서 나는 형이라고 부른다. 유명인사 중에 나의 중앙SUNDAY 연재가 재밌다고 칭찬해준 최초의 형님이시다. 손기정 선생 얘기가 재미있었단다. 본인도 초등학교 다닐 때 일곱 명씩 뛰면 꼭 꼴찌였단다. 내가 왜 꼴찌였냐고 물었다. 당신도 별명이 가분수였단다. 한참 웃다가 끊었다).
 
시골 국민학교 연중 최고의 잔칫날은 가을 운동회다. 그중에서도 운동회의 꽃은 단연 학교 대항 400m 릴레이다. 운동회날 해가 뉘엿뉘엿 서산에 걸릴 때쯤이면 교정이 술렁거린다. 최종 순서인 각 학교 대항 400m 릴레이가 벌어지기 때문이다. 이쪽저쪽 모퉁이에서 사람들 틈을 비집고 원정 온 학교 선수들이 다리를 풀며 등장한다. 반드시 윗옷 메리야스(그땐 흰 상의를 메리야스라고 불렀다) 차림으로 등장한다. 가슴팍엔 반드시 자기네 학교의 이름이 쓰여 있다.
 
예산, 덕산, 안치, 오가, 갈산, 고덕, 신례원, 한 줄로 세운 다음 심판 선생님이 거만한 자세로 딱총을 높이 든다. 고덕 같은 학교는 앞에 학교 이름을 임시로 먹글씨로 썼는지 벌써 땀에 절어 번져 있다. 땅! 운동장이 떠나간다. 네 번째 마지막 주자로 우리의 홍수근 형이 나선다. 그리고 우리는 알고 있다. 앞에 가는 선수들이 아무리 많아도 우리 수근 형은 모조리 따라마실 거라는 사실 말이다. 내 기억에 나의 예상은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기 때문이다. 원정경기에서도 마찬가지다. 웬만한 거리의 다른 학교 운동장엘 나는 맥없이 따라다니곤 했다. 내가 하는 일은 물 주전자를 들어주는 일이 전부였다.
 
나는 경식이 형의 지난 얘기를 듣자고 했다.
 
“응, 내가 서울 와서 돈을 좀 벌었어. 쓸 만큼 벌었어.”
 
쓸 만큼 벌었다는 충청도식 표현은 돈을 아주 많이 벌었다는 뜻이다.
 
“용평에 별장도 있구, 제주도에도 뭐 하나 있구.”
 
홍수근과 김경식 형은 예산중학을 거쳐 대전고등학교로 갔다는 얘기를 쭉 들어왔다. 당시 대전고등학교는 충청도의 일등들만 모인다는 학교였다. 그들이 점점 내게서 멀어져가는 것이 나는 문득문득 안타까웠다. 무슨 신세한탄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런 걸 할 줄 알면 벌써 시골 아이가 아니었다.
 
그즈음 우리 집은 최악이었다. 아버지가 중풍으로 반신불수라 한입이라도 덜어야 했던 어머니는 나를 큰 누나가 일하는 서울로 올려보냈다. 아버지에겐 병이었고 나한텐 약이었다. 왜냐면 나는 나중에 서울음대에 합격했기 때문이다. 물론 홍수근 형은 서울법대에 당당히 입학했다는 걸 익히 알고 있었다.
 
나는 밤무대가 더 남아 있었다. 경식이 형도 일어섰다. 나는 맘속으로 쭉 묻고 싶었던 질문을 방금 생각난 듯이 물었다.
 
“참! 수근 형은 요즘 워디서 산댜” 물어봤다. 고등고시를 몇 번이나 떨어졌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잉! 수근이 잘 있어. 노량진 근처에 사는디 무슨 건설 총무과장으로 올라갔댜.”
 
경식이 형이 수근 형 고시 칠 때 쭉 경제적으로 도왔다는 얘기도 시골 동창 애들을 통해 듣고 있었다.
 
우리는 내 일정이 모두 끝난 새벽에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다시 만났을 때 박 사장이라는 사람이 같이 나왔다. 술자리가 파할 무렵 박 사장이 우리 사이로 붙었다.
 
“아니 아직 그 얘기가 없었나.”
 
박 사장이 말을 이었다.  “사실은 말여 경식이 엄니의 칠순이 내일 모렌디 요번엔 칠순 잔치를 좀 크게 치를 모양인디 다름 아니라 경식 엄니가 영남씨를 꼭 좀 보구싶어 혀서 난리를 치셨어.”
 
이튿날 아침 잠결에 매니저 전화가 여러 번 울린 듯했다. 나는 간신히 전화기를 들고 “어어” 하다가 “잠깐 내 시골 선배라는 사람, 내일 공연이 있어 잔칫집에 못 간다고 적당히 둘러대 줘. 가만있어. 내가 전화번호 줄게”, 나는 아무렇게나 벗어 던진 옷을 뒤져 경식 형의 명함을 찾았다.
 
동네 형 어머니 고희연서 노래 불러  
 
여기까지다. 여기까지 70매를 쓰는데 한 달 넘게 걸렸던 것 같다. 소설을 끝내려고 잔칫집엘 안 가는 것으로 소설을 마감했는데 실제로는 잔칫집엘 갔었다. 노래도 불러주고 무엇보다 경식이 형 동창들 그중에서도 내가 그토록 보고싶어 했던 나의 평생 영웅 홍수근 형도 만나보게 된다. 그날 나는 꿈에도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된다. 수근 형이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고시를 쳤는데 무려 아홉 번이나 떨어졌다는 사실 말이다.  
 
왜 떨어졌을까. 무슨 심각한 애정 문제라도 있었던 걸까. 그런 걸 직접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 나는 반드시 알아내리라 마음먹고 그 비밀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 홍수근 형을 쭉 보살폈다는 경식이 형한테 바싹 매달렸다. 내가 “수근이 형은 왜 고시를 아홉 번이나 떨어졌디야” 하고 물으면 늘 그런다. “물러, 내가 워치기 그걸 안댜.” 그런데도 나는 안다. 틀림없이 안다. 경식이 형만은 알고 있다. 말을 안 할 뿐이다. 경식이 형은 매년 장애아들을 비행기에 태워 제주도까지 데리고 가 정기적으로 휴가를 제공해주는 프로그램도 했다. 나는 부지런히 따라가 장애아이들과 제주 동네 사람들을 모아놓고 특별공연도 해주었다. 그건 순전히 왜 홍수근 형이 고등고시에 아홉 번이나 떨어졌는지 그걸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형, 내가 형한테 해줄 수 있는 건 다 했어. 이젠 말해봐. 수근 형이 왜 고시에 아홉 번이나 낙방했는지를.”
 
형은 매번 뜨문뜨문 이런 식으로 말하곤 했다.  “영내미 동생이 웃을깨미 말 못히여!”
 
‘웃을깨미’는 충청도 식으로 ‘웃을까봐’다.
 
“형, 내가 남 슬픈 일에 왜 웃는다고 그려유 형.”
 
경식 형은 몇 번이나 머뭇머뭇대다가 결국엔 새삼 조심스럽게 천천히 나한테 대답했다.
 
“음, 그건 말여. 수근이네가 무덤을 잘못 쓴거여.”
 
나의 진짜 소설은 여기까지다. 나는 사실에 근거해서 썼다. 두 분 형님들은 잘 살아계신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