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산림에 서식하는 딱정벌레의 몸길이다. 좁쌀 크기의 이 작은 곤충이 올여름 미국 서부를 강타한 산불의 숨겨진 범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지난 8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과 온라인 매체 복스(VOX)는 딱정벌레 등 따뜻한 지역에 서식하던 곤충들이 지구온난화의 영향에 전역으로 퍼져나가 산불의 ‘시한폭탄’이 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나무 파고드는 딱정벌레 '소나무좀'의 습격
WSJ에 따르면 미국에 서식하는 딱정벌레는 600여종으로 이 가운데 12종 정도가 나무를 갉아먹는 해충으로 꼽힌다. 그중 가장 악명 높은 딱정벌레는 ‘소나무좀(pine beetle)’이다. 미 남동부, 멕시코, 중앙아메리카에서 주로 발견되던 소나무좀은 2014년 뉴욕주 롱아일랜드에서 급속도로 퍼져나가더니 북부 산림을 위협하는 존재가 됐다.
소나무좀의 주요 먹잇감은 소나무와 잣나무다. 이 딱정벌레는 나무껍질을 벗기고, 구멍을 내 파고들어 간 뒤 알을 낳아 번식한다. 나무도 수액을 내보내 대항한다. 하지만 소나무좀의 공세가 워낙 강해 당해낼 재간이 없다. 공격을 받은 나무는 1년 사이 수분 80~90%를 잃고 말라죽고 만다. 뉴욕주의 경우 소나무좀이 등장한 지 7년 만에 소나무 1만 그루가 잘려나갔다.
지구온난화가 키운 시한폭탄, 미 산림·생태계 위협
여기에 지구온난화가 부른 또 다른 악재, 가뭄과 폭염이 덮치며 악순환이 시작됐다. 딱정벌레에 감염돼 말라 죽은 나무가 가뭄과 폭염이 만든 산불과 만나 주원료가 되면서다.
기상학자 맷 자피노는 지난 7월 산불에 휩싸인 서부 오리건주도 딱정벌레에 당한 셈이라고 주장했다. 오리건주는 2주 이상 계속된 산불로 서울 면적(605.2㎢) 3배가 사라졌다. 자피노는 “가뭄과 폭염이 길어지면서 나무가 수액 생산을 줄였고, 그 틈에 딱정벌레들은 개체 수를 늘렸다”면서 “딱정벌레에 감염돼 말라 죽은 나무들이 산불을 키웠다”고 설명했다.
이런 주장은 2015년 캘리포니아 산림 15만 에이커(607㎢)를 태운 ‘러프 파이어’부터 시작돼 매해 미 산불 자연재해 연구에서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지난해 17만 에이커(687㎢)를 태운 캘리포니아 시에라 네바다 산맥 산불 때도 불탄 목재 90%가 딱정벌레에 의해 죽은 것이었다고 소방 관계자들은 전했다.
“나무 고사율 높아…대형 산불 더 잦을 것”
그렇다면, 악순환의 연결 고리를 끊을 순 없는 걸까. 아이러니하게도 딱정벌레를 박멸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으로 꼽히는 게 ‘산불’이라고 한다. 미국 산림청의 연구생태학자 샤론 후드는 “전문가들은 산불 관리와 해충 관리를 위해 통제된 상황에서 산불 놓기를 효과적인 방법으로 추천한다”면서 “소규모 산불의 경우 직접적 피해가 없는 한 확산을 막는 정도로 대처해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이에 반대하는 측은 산불이 이산화탄소를 대량으로 발생시키는 동시에 이를 흡수할 숲을 태워 전 지구적 온난화를 가속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결국 산불은 최대한 조기 진압하고, 딱정벌레는 농약 등으로 확산을 막아야 한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