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주현의 비욘드 스테이지] 발레리나 박세은
콧대 높은 파리지엥의 자존심과도 같은 파리오페라 발레단에서 최초로 동양인 에투알(수석무용수)이 탄생했으니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지난달 10일 352년 역사의 ‘발레 종갓집’ 왕관을 차지한 발레리나 박세은(32) 얘기다. 2011년 준단원으로 입단해 10년 동안 차근차근 계단을 올라 마침내 꼭대기에서 빛나는 ‘별’이 됐다. 코로나19로 문을 닫았던 발레단이 1년여 만에 올린 전막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 첫 공연에 주역으로 나선 날이라 더 극적이었다.
파리오페라발레단 수석무용수
‘발레 종가’ 입단 10년 만에 왕관 써
평론가 “춤출 때 안정감 경이로워”
5년 전 큰 부상 딛고 무대 투혼도
“백조의 움직임 표현 가장 어려워”
‘로미오와 줄리엣’ 내한공연 소망
오는 9월 시즌 오프닝에 발레학교 학생부터 에투알까지 서열대로 행진하는 ‘데필레’에서 그는 실제로 왕관을 쓴다. 새 에투알을 위한 갈라 프로그램도 그에게 바쳐진다. “렌더의 ‘에튀드’란 작품을 해요. 매일 아침 워밍업하는 클래스를 작품화시킨 건데, 굉장히 테크니컬하죠. 테크닉에는 마음을 내려놓은 지 오래 돼서 부담이 되긴 해요.”
세계 4대 발레 콩쿠르 중 3개 석권
대인배적인 안정감이 닮은꼴이라서인지, 그의 에투알 승급은 피겨 여제 김연아의 금메달에 곧잘 비유되는데, 그는 “금메달과는 다르다”고 했다. “이력서상으로 정점을 찍었지만 제 춤은 이제부터 시작이니까요. 이제 제 춤만 추면 되니 자리에 대한 긴장과 욕심은 없지만, 모범을 보여야 하는 자리에 오른 만큼 책임감을 느끼거든요. 더 철저하게 준비해야겠어요.”
“제가 열네 살에 발레협회 콩쿠르부터 시작해 온갖 콩쿠르에 나갔거든요. 심사받는 데 익숙하다 보니 요령을 좀 알아요. 발레단에 처음 왔을 때 프랑스 애들이 승급 심사에 너무 스트레스를 받길래 이상했는데, 세 번째 심사부터는 저도 힘들더라고요. 전에는 나만 잘하면 됐다면, 이제 경쟁자를 아니까요. 다 같이 연습하고 서로 조언도 하는 선의의 경쟁이긴 하지만, 이번에 안 되면 경쟁자는 점점 늘게 되니 마음이 약해지죠. 2017년 제1무용수 승급 때는 정말 사람 할 짓이 아니라고 느꼈고, 안 되면 도전을 접고 솔리스트에 만족하려고 했어요. 더 이상 스트레스 받고 싶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주고 공정하게 평가하는 제도인 건 사실이에요. 모든 사람 앞에서 승진했으니 배역을 줘야 하죠. 만약 단장 눈에만 들면 됐다면 이방인인 제게 기회가 없었을 수도 있고요.”
드라마 속 에밀리 못지않은 이방인의 설움도 겪었다. 드라마 이야기를 꺼내니 “파리에 그런 사람 꼭 있다”며 재밌어한다. 과장은 있지만 치열한 현실이라는 것이다. “저도 처음에는 적응이 안 되고 상처도 많이 받았어요. 근데 익숙해지고 보니 오히려 포장되지 않은 순수함이랄까. 싫은 걸 돌려 말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하는 걸 쿨하다고 여기더라고요.(웃음) 저는 동료들 이야기를 많이 들으면서 친해졌어요. 일단 들어야 발레단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아니까요. 한류 덕도 봤죠. 요즘 동료들이 ‘앨리스’라는 한국 드라마에 빠져 있거든요. 이번 공연에서도 줄리엣이 친구들과 손잡고 나가는 장면에서 잔뜩 긴장하고 있는데, 뒤에서 ‘안녕?’하더군요. 긴장이 확 풀리면서 자연스럽게 나갈 수 있었어요.”
어려서부터 세계 4대 발레 콩쿠르 중 3개(잭슨·바르나·로잔)를 석권한 유망주였기에 한국에선 국립발레단의 ‘백조의 호수’ 같은 큰 무대에서 주역만 맡았다. 하지만 파리에서는 무대에 서지도 못하고 뒤에서 대기만 하던 시간들이 “황금같은 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때 정말 많이 보고 배웠어요. 늘 솔로를 추느라 남의 춤을 구경할 시간이 없었는데, 프랑스 춤을 그때 익힐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특유의 엘레강스함이 있거든요. 정적인 동작에서 나오는 그 아우라는 직접 봐야 알 수 있죠.”
그는 서양인에게 뒤지지 않는 완벽한 피지컬로 유명한데, 콤플렉스도 있다고 최초로 고백한다. 발레리나 고유의 미의 기준인 발등 아치가 평평한 편이라 숨기기에 급급했는데, 이제는 말할 수 있단다. “승급 후에 오를리 뒤퐁 감독이 제 장단점을 꼽아주면서 ‘콤플렉스를 사랑하라’고 얘기해줬어요. 사랑하지 않으면 거기에 집착하게 된다면서요. 단점을 숨기려고 스스로를 힘들게 했었는데, ‘네가 아니면 누가 네 발을 사랑해주겠느냐’는 말에 생각이 바뀌더라고요.”
‘오페라의 유령’이 산다는 파리오페라 극장에 매일 살다시피 하기 때문일까. 박세은은 어딘가 요즘 사람 같지 않았다. 드가의 그림에서 튀어나온 발레리나의 이데아 같다. 스스로도 “89년생이지만 옛날 ‘갬성’이 좋다”며 “옛날에 고전발레를 췄던 사람들에게 물려받는 전수 과정도 너무 좋아한다”고 했다. “며칠 전 공연 티켓을 구하러 극장의 한 사무실에 찾아갔는데, 제가 10년 동안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길로 가야 하더군요. ‘이런 곳이 있었냐’고 했더니 동료가 ‘여기가 유령이 다니는 길’이라는 거예요.(웃음) 그런 곳이라 갈 때마다 신기해요. 19세기를 사는 느낌도 있죠. 식당에 쥐도 잘 다니고요.(웃음)”
파리 동료들 덕에 트라우마 극복
‘고전발레를 사랑한다’면서도 고전 중의 고전인 ‘백조의 호수’가 가장 어렵단다. 발레 레퍼토리가 다채로운 프랑스에서는 자주 올리지 않아 기회가 드물기 때문이다. “제가 백조를 딱 4번 했어요. 그중 3번을 프랑스에서 했는데, 행운이었죠. 39살 에투알이 처음 백조 데뷔하는 일도 있을 정도로 기회가 없거든요. 할수록 조금씩 늘긴 하는데 정말 어려워요. 동물의 움직임을 표현하기도 어렵고, 오데뜨와 오딜 양쪽을 하는 것도 어렵죠. 정말 저를 고뇌하게 만드는 백조예요.(웃음)”
2018년 발레계 아카데미상이라 불리는 ‘브누아 드 라 당스’를 수상한 그는 2016년 수상자인 마린스키 발레단의 김기민과 어린 시절 국립발레단 ‘백조의 호수’를 비롯해 ‘돈키호테’ ‘라바야데르’ 등에서 찰떡 호흡으로 레전드 무대를 펼친 바 있다. 각각 프랑스와 러시아의 별로 등극한 두 사람의 파드되를 다시 볼 날이 언제일까. “기민이는 이제 세계적 스타가 됐는데, 그 옛날에 제가 배운 것도 많아요. 제가 프랑스 춤과 러시아 춤 사이에서 갈등할 때도 기민이와 얘기 많이 나누며 답을 찾았죠. 무대도 좋지만 그와의 연습 과정이 참 좋아서, 다시 함께 춤출 날을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