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철 단골 주자인 유승민 전 의원은, 시쳇말로 여가부 폐지론 ‘선빵’을 날리며 주목을 끄는 데는 일단 성공했다. 그의 ‘전리품’론엔 동감이다. 그게 이 특수한 정부기관이 제 역할은커녕 뜬금없는 정책과 행동으로 짜증을 유발하며 ‘국민 밉상’으로 찍힌 고질적인 한계를 드러내는 말이기 때문이다.
여가부 장관은 정치적 전리품 자리
부처 폐지 주장한 보수 대선 주자
소외되고 뒤처진 사회 약자 문제
제대로 직면하고 대안부터 내놔야
여성부 출범 당시에도 국가 정책 전반에 걸친 성 평등 사안이 여성부라는 작은 정부 기관의 문제로 갇힐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던 걸 기억한다. 그 우려와 한계가 현실이 되었고, 이젠 노련한 선동가들이 이 시대 만악의 근원이 여가부와 여성들인 양 몰아가도 변변하게 변명도 못 하는 처지가 됐다.
최근, 왕년에 우리나라 여성 운동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며 운동을 이끌었던 선배 몇 분과 이야기를 나눴다. 이 자리에서도 여성 리더십 발휘를 기대했던 여성 정치인들의 한심하고 실망스러운 현주소에 대한 한탄이 나왔다. “그들은 여성이 아니라 그저 정치인일 뿐” “여성계 몫으로 의회에 진출한 뒤 기득권자인 양 변질되는 모습에 실망한 적도 많다.”
그러나 결론은 언제나처럼 ‘이가 갈려도 참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랜 세월 ‘비주류 인류’로 살았던 기억을 공유하는 우리 세대 여성들은 정치적 의미로서의 대표성(representation)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기 때문이다. 대의민주주의 체제에서 대표성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투명 인간이나 마찬가지다. 어떤 집단이든 그들의 불평등과 차별, 소외와 이익 등을 대변해 의회·정부·사회를 대상으로 주장하고 싸워줄 대표 선수가 없으면 문제는 표면화 되지도, 알아주지도, 해결되지도 않는다는 말이다.
여성 정치는 여성 문제나 그 문제의식과 동일하지 않다. 조금만 들여다보면 여성 문제는 곧 사회 약자들의 문제를 대변한다는 걸 알게 된다. ‘성평등’이라는 문제의식은 인간을 ‘주류 vs 비주류’ ‘일등시민 vs 이등시민’으로 나눠선 안 된다는 이야기다. 여성 운동의 의미는 기득권층이 약자 위에 군림하는 못된 관습에 대한 도전과 저항에 있다. 여성 운동이 이 정도 성과를 낸 것은 인류의 절반이라는 수적 우세에서 나온 측면이 있다. 투표권이 한 일이고, 이 과정에서 소수자의 문제는 연대해 한목소리를 내는 것으로 진전될 수 있다는 경험을 갖게 된 건 큰 성과다.
여성 선배들과 한 여성 운동의 미래에 관한 이야기에서도 소수자들의 소외와 인권 회복이 주된 주제였다. 더 다양하고 복잡해진 소외 문제들. 예를 들어 성소수자와 이주 노동자들처럼 대표성의 부재로 진전되지 않는 문제들, 고령화 사회에서 ‘주도권을 잃은’(powerless) 남성 노인의 소외와 이로 인한 고령 부부의 갈등 등. 이젠 ‘성’이 아니라 소외와 배제로 인해 ‘비주류’로 전락한 사람의 문제를 더 찾아내 살펴야 한다는 얘기를 했다.
어느 사회든 소외되고 뒤처지는 사람들은 나오게 마련이고, 국가는 이들을 챙기고, 문제를 발견해 해결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아무리 작은 정부라도 말이다. 여성부의 본래 일은 이등시민이었던 여성 지위의 정상화와 정책 밖으로 소외된 시민들의 삶을 개선하고 지위를 회복하는 것이다. 장관 자질이나 그들이 제대로 일하고 있는지와는 별개로 말이다.
‘여가부 폐지’를 제기한 보수 정당의 일부 대선 주자와 당 대표는 폐지론과 함께 이런 문제의식과 대안도 말해야 했다. 그런데 그들의 주장에선 전리품을 챙기는 여성 정치인에게 배가 아프거나 예산 낭비라는 정치적 이유 말고는 어떤 철학적 사회적 고민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오히려 분노한 청년들에게 마치 그들의 불행의 근원이 여성에게 있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며 아부하는 ‘분열의 정치’로, 표를 끌어모으려는 행태라는 인상만이 선명하다. 그저 이런 주장이 평소 보수가 추구하는 ‘기득권층의 이익 보호와 극대화’를 위해 사회의 약한 고리는 끊어버리고 싶은 욕망에서 발현된 것이 아니기만을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