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83〉
황하 범람해 1000만여 명 희생
중 파견 미 선교사 스미스도 지원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서신 보내
미, 마침내 1160만 달러 반환 통보
량의 후임 중 1호 해외박사 우팅팡
매년 중 학생 100명 미 유학 제안
중, 칭화학당 만들어 유학생 모집
30여 년간 중국에서 온갖 체험한 스미스는 경자년 배상금으로 중국 청년들을 미국에서 교육 시키자는 주미공사 량청(梁誠·양성)의 구상에 공감했다. 대통령 루즈벨트에게 중국 학생들의 미국유학과 교회학교 설립을 역설하는 서신을 보냈다. “중국에 거대한 변화가 발생한 것 같아도 진짜 변화는 시작하지도 않았다. 조만간 시동이 걸리면 엄청난 속도로 진행될 것이 분명하다. 물질이 도덕을 압도하는 변화가 서구에 악영향을 끼칠까 우려된다. 중국인들에게 진정과 성실로 용기와 희망을 줄 적절한 시점이다. 노 대국의 거대한 변화를 영접할 준비와 방법을 심사숙고하기 바란다.”
량청은 신발 끈을 조여 맸다. 내무장관 카필드와 공상부장관 스트라우스의 집무실에 진을 쳤다. 량의 극성은 효과가 있었다. 배상금 반환이 환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량은 본국 외교부에 후임자를 물색해 달라고 요청했다. 중국 외교부는 의화단사건 시절 주미공사를 역임했던 우팅팡(伍廷芳·오정방)을 량의 후임으로 정하고 미국 측에 통보했다. 소식을 들은 루즈벨트는 량을 백악관으로 불렀다. 관계 장관까지 배석한 자리에서 귀국 전까지 배상금 반환을 결정하겠다며 량을 안심시켰다. 1907년 6월 15일, 신임 국무장관이 청나라 정부에 1160만 달러를 반환하겠다고 통보했다.
임무를 마치고 귀국한 량청은 진이 빠졌다. 모친이 있는 고향으로 낙향했다. 치료를 위해 홍콩으로 이주했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이 병원 저 병원 전전하다 52세로 숨을 거뒀다. 우팅팡은 공사가 아닌 흠차대신 직함으로 미국에 부임했다. 우는 지금은 광저우에 편입된 팡춘(芳村)의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다. 14세 때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물려받은 유산으로 영국유학 길에 올랐다. 런던에서 중등교육 마치고 런던대학 법학박사 학위 받은 중국의 1호 해외박사였다. 홍콩의 법률사무소에 재직 중 해외순방 떠나는 북양대신 리훙장(李鴻章·이홍장)을 만나 인연을 맺었다. 통상교섭대신을 겸하던 리는 외국과 교섭할 외교관 후보를 물색 중이었다.
리훙장은 사람 보는 눈이 까다로웠다. 사람을 함부로 쓰지 않았다. 우팅팡을 가까이 두고 이일 저일 시키며 5년간 관찰한 후 측근에게 우의 인물평을 했다. “생긴 것과 복장만 중국인이다. 뉴잉글랜드의 미국인 상대하기에 저만한 인재가 없다.” 성격이 급하다며 재고를 요청하는 측근의 권유도 묵살했다. “급한 것과 민첩한 것은 다르다.”
베이징에 미국유학예비학교 신설
청나라 정부는 황실정원칭화위안(淸華園)에 유미학무처(游美學務處)를 신설하고 학생을 모집했다. 정부시책과 미국유학 조건을 갖춘 응시가 거의 없었다. 응시자의 질을 높이기 위해 학무처의 명칭을 칭화학당으로 바꿨다. “중국의 영수급 인재를 양성하는 실험학교”라며 대대적인 선전에 나섰다. 중국은 소문이 빠른 나라였다. 순식간에 전국에서 지원자가 몰려들었다.
선발 과정은 엄격하고 혹독했다. 중간에 때려치우는 응시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지원자 630명 중 중국역사와 중·미관계에 새 장을 열 47명이 합격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