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문은 국내 최대 거래소인 업비트가 열었다. 지난 18일 코인 24종의 상장 폐지를 발표했다. 지난 11일 이미 상장 폐지한 5개 종목과 합치면 이달 들어 29개의 코인을 상장 폐지했다.
거래대금 규모로 국내 5위 안에 드는 프로비트는 지난 1일 무려 145개 코인을 상장 폐지했다. 지난달 상장 코인 개수(365개)와 비교하면 66%가 거래 목록에서 사라졌다.
무더기 상장 폐지가 이어지며 투자자들의 피해도 커지고 있다. 상장폐지가 결정된 코인 가격이 급락하면서다. 업비트에서 상장 폐지된 엔도르의 경우 지난 10일 종가 기준 55원이던 가격이 21일 오후 3시 기준 10.6원에 거래되고 있다. 상장폐지 절차를 밟기 시작한 뒤 가격이 80%가량 떨어졌다.
거래소의 일방통행식 상장 폐지에 따른 급락으로 피해를 본 개인 투자자들은 커뮤니티 등에 "거래소가 심사를 통해 상장을 결정해놓고 내부 규정만을 이유로 일방적으로 상장폐지를 결정해도 되냐"는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깜깜이 상장'과 전격 상폐, 불량코인 상장도 빈번
거래소 입장에서는 상장된 코인이 많을수록 거래 수수료를 많이 챙길 수 있다. 6월 전 총 178개 코인이 거래됐던 업비트가 지난 1분기 수수료 등으로 거둔 영업이익은 5400억원이다. 업계 관계자는 "후발주자인 업비트는 다른 거래소가 취급하지 않은 코인을 상장시켜 업계 1위로 올라섰다"고 말했다.
김형중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특임교수는 “투자자 보호 등을 빌미로 명확한 기준을 밝히지 않은 채 수많은 암호화폐를 상장 폐지하는 행위가 오히려 투자자 피해를 키우고 있다”며 “코인 개수를 줄이는 게 투자자 보호가 아니라 상장과 상장 폐지 등에 관련된 규정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게 투자자 보호”라고 말했다.
은행 실명계좌 심사…코인 정리 작업 계속될 듯
특금법에 따라 암호화폐 거래소는 ①정보보호관리체계(ISMS) 인증 ②시중은행과 실명계좌 발급 제휴 등을 필수적으로 받아야 한다. 관건은 시중은행의 실명 계좌 발급이다. 현재 실명계좌를 발급받은 거래소 4곳(빗썸ㆍ업비트ㆍ코빗ㆍ코인원)도 재계약을 위해 시중은행의 ‘가상자산 사업자 자금세탁 위험평가’를 받고 있다. 나머지 거래소들은 위험평가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투자자의 반발에도 대형 거래소들이 코인을 대량 상장 폐지하는 것은 그만큼 현재 분위기가 좋지 않다는 뜻”이라며 “코인을 대량으로 줄이는 등의 성의를 보일 필요가 있다고 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은행연합회의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상장된 코인 개수가 많을수록 (암호화폐 거래소) 평가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
현재 특금법에는 금융당국이 상장 등 암호화폐 시장을 직접 규제할 근거는 마련돼 있지 않다. 그나마 시행령을 통해 거래소가 자체적으로 만든 암호화폐를 직접 상장하지 못하게 하는 규정이 추가됐다.
당국, 직접 규제에 나설 계획은 아직 없어
때문에 투자자들 사이에서는 금융당국이 직접 암호화폐 상장이나 상장폐지 과정을 규제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금융권 관계자는 “금융당국이 자산교환 가치가 있는 암호화폐만 인정하고 암호화폐 관련 항목을 직접 꼼꼼하게 규율하는 싱가포르 방식의 규제를 검토하고 있는 거로 안다”고 말했다.
박성준 동국대 블록체인연구센터장은 “불량 코인을 정리하는 건 시장의 건전한 자정작용이라는 점에서 방향은 맞지만 문제는 속도”라며 “암호화폐 시장이 연착륙할 수 있도록 정부 당국이 나서 일정 기간 유예기간을 주고 정확한 가이드라인을 주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금융당국은 당분간은 직접 규제의 칼날을 들이댈 계획은 없다는 입장이다. 금융당국 고위 관계자는 “정부가 직접 나서는 게 좋을지, 업계에서 셀프규제를 하는 게 나을지 등에 대해서는 국회에 발의된 관련 법안의 입법 과정에서 치열한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안효성 기자 hyoza@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