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한끼] 김창열
백남준(1932~2006)이 피아노 앞에 앉아 ‘봉선화’, ‘가고파’를 연주했다. 침을 질질 흘리며 연주하는 모습이 왠지 거북했다. 거북함은 잠시였다. 이윽고 선율을 따라 여름날의 봉선화가 애틋하게 피었다가 가을 찬바람에 쓸쓸하게 졌다. 파리 시내 한가운데에 마산 앞바다가 부풀어 오르며 파도가 밀려들었다. 정기용(1932~)은 피아노 연주에 따라 몸과 손가락을 비비 꼬면서 전위적 춤을 추었다. 북방 사나이 김창열은 서도 창법으로 ‘박연폭포’를, 정상화의 부인은 백설희의 ‘봄날은 간다’를, 박명자(1943~)는 윤복희의 ‘웃는 얼굴 다정해도’를 불렀다. 정상화(1932~)는 조용히 웃을 뿐 끝까지 침묵이었다. 1982년, 파리의 하룻밤은 흐뭇하고 즐겁게 흘러갔다.
양다리에 칼집 내 마늘 박아 구워
파리 아파트 찾은 손님에게 대접
백남준·이우환·백건우 등 자주 방문
캔버스 재사용하려 물로 씻다가
물방울 조형적 아름다움에 꽂혀
달리가 격려, 세계 미술계 흔들어
와인 감별법 “비싼 게 가장 좋아”
가난한 화가에게 주어진 아틀리에는 파리 근교 팔레소의 마구간이었다. 나중에 그의 부인이 되는 마르탱 질롱을 만나 힘든 생활을 이어갔다. 어느 날 캔버스를 재생할 목적으로 물로 씻어 내다가 햇살을 머금은 물방울의 기막힌 조형적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여기에 착안한 물방울 그림으로 1972년 가구점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우연히 이 전시를 본 잡지 콩바의 기자 알랑 보스케가 대서특필했는데 그 반향이 컸다. 여배우 카트린 드뇌브(1943~)가 그림을 구입하고 살바도르 달리(1904~1989)가 전시장을 찾아와 격려했다. 결혼을 반대했던 처가의 식구들은 이 멋진 청년이 하루라도 빨리 자신들의 가족이 되기를 열렬히 원했다.
김창열은 물방울 그림의 성공과 함께 금의환향했다. 도쿄의 도쿄화랑과 서울의 현대화랑에서 완판을 했다. 한국의 최첨단 현대미술을 이끌었으나 경영에는 부진했던 명동화랑을 위해 서울에서 급히 제작한 드로잉들로 갑작스러운 전시를 열었다. 명동화랑의 김문호 사장은 처음으로 그림을 팔아서 큰돈을 만질 수가 있었다. 이로써 미술계의 의리도 지켰다.
무슈 구토가 살던 뤽상부르공원 근처의 노트르담데샹 44번지 아파트는 고위 공무원을 지낸 장인의 아파트다. 3층(프랑스식으론 2층)에는 김창열 가족이, 그 위층에는 쌍둥이인 질롱의 뱃속 자매가 살고 맨 아래층은 월세를 받는 문방구점이었다.
1973년 조각가 심문섭이 처음으로 파리를 찾았을 때, 김창열은 낯선 외국음식에 지친 후배를 위해 자신이 직접 담근 슴슴한 물김치를 내어놓았다. 뱃속에 쌓인 느끼함을 한 방에 확 쓸어 내는 시원한 맛이었다. 청춘을 보낸 서울에서와 마찬가지로 파리에서도 그의 곁에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뤽상부르의 아파트에는 백남준, 이우환,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영화배우 윤정희 부부 등이 수시로 찾아왔다. 그의 아파트는 넓었고 술과 요리가 풍요로웠다.
한국인 화가 중에서 가장 와인에 정통하다는 이우환(1936~), 프랑스의 농장주 협회에서 와인을 제대로 아는 문화인에게 수여하는 기사 작위를 받은 유일한 한국인 김창열, 이 둘이 만나면 와인 선택을 두고 심각한 토론이 벌어진다. 최고의 지식과 최심의 직관력, 둘 다 지극한 경지다. 김창열은 부르고뉴 와인도 좋아했지만 론 지방의 지공다스 와인 또한 애호했다. 김창열의 와인 감별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어떤 와인이 가장 좋습니까?”라고 물으면, “가장 비싼 걸 마시면 돼” 하고 싱거운 대답이 돌아온다. 값이 비싸게 매겨진 와인에는 그럴만한 이유 즉, 높은 가치가 그 속에 숨어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그의 장인은 파리 근교의 넓은 시골집을 사위에게 위임했다. 한국에서 중요한 미술관계자가 오면 시골집에서 파티를 열었다. 파리의 후배 화가들을 초대하여 소개했다. 마당에선 양 두 마리를 통째로 구웠다. 엄청난 양의 과일과 포도주가 배달됐다. 김창열의 아침은 소박했다. 가정용 일제 떡 기계로 만든 인절미 한 조각에 미역국이 전부다. 대신 파티는 거창했다.
1980년대 중반 평창동에 우규승의 설계로 작업실 겸 자택이 지어졌다. 1990년대에는 남불의 드라기냥에도 새로운 작업실을 마련했다. 평창동 이웃 구기동에는 싸리집이라는 보신탕집이 있다. 김창열과 우규승은 단골이 됐다. 갤러리현대의 두가헌에서 양고기 요리를 내놓자 한 달에 한 번은 찾았다. 평안도 출신답게 고기를 먹고 나면 꼭 찾는 게 냉면이었다. 아무리 배가 불러도 냉면이 들어갈 배는 따로 있다고 주장했다.
평안도 출신, 고기 먹은 뒤엔 냉면
김창열의 물방울 그림을 가까이서 보면 물방울의 형상은 사라져 버리고 없고 투박한 물감 덩어리만 나타난다. 물방울이라는 일루젼과 물감이라는 물성 사이를 하나의 캔버스에서 극단적으로 오갈 수 있음을 보여 준 게 세계현대미술계에 통했다. 일루젼과 물성의 거리는 천과 지, 공간의 집인 우(宇)와 시간의 집인 주(宙), 본질과 현상의 거리만큼이나 멀다. 급기야 캔버스 위에 천자문을 계속 겹쳐 쓰면서 무슨 글자인지도 모를 지경까지 갔다. 천지현황, 우주홍황의 경계에 오직 하나, 붓을 움직이고 있는 내 몸의 부단한 수신(修身)만이 있을 뿐이라는 경지였다. 곧 사라질 물방울과 같은 찰나적 삶의 운명에서 영원을 길어 내는 자신을 그렇게 표현했다.
2016년 그가 전쟁 때 근무했던 제주시에 김창열미술관이 들어섰다. 그의 육신과 그가 육신으로 보았던 물방울은 다 떠났는데, 그림 속의 물방울은 큰 가르침처럼 사라질 생각 없이 영롱하게 맺혀 있다.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전시기획과 공학과 미술을 융합하는 학제 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현대화랑에서 일하면서 지금은 거의 작고한 대표적 화가들을 많이 만났다. 문학·무용·음악 등 다른 장르의 문화인들과도 교유를 확장해 나갔다. 골목기행과 홍대 앞 게릴라 문화를 즐기며 가성비가 높은 중저가 음식을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