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초 고립된 중국을 국제무대로 끌어내 수십 년간 엄청난 경제성장의 기반을 제공한 사람은 다름 아닌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었다. 그는 1994년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중국을 경제적으로 포용하고 정권을 강화시켜 준 것이 중국에 정치적 자유를 가져왔냐는 질문을 받고 “우리는 프랑켄슈타인을 만들어냈는지도 모른다”라고 답했다. 양제츠의 발언은 27년 전 닉슨의 기우가 현실이 되었음을 확인해준 셈이다.
협력보다 적대 동력 큰 미·중 관계
민주주의·인권 강조에 위기감 중국
권위주의 국가들과 연합 모색
한반도, 냉전2.0 최전선 몰릴 것
대외적으로 2008년 금융위기에서 보여준 미국의 허약한 모습은 중국의 지도자들에게 자신감을 갖게 했다. 그 결과 실력을 기르며 때를 기다리라는 덩샤오핑의 전략지침인 ‘도광양회(韜光養晦)를 버리고 과감히 공세 외교를 펼치기 시작했다. 최근 미국의 코로나 사태에 대한 부적절한 대응, 인종 폭동, 극심한 정치적 분열 등도 중국 지도자들에게 한층 더 자신감을 심어준 듯하다. 이 같은 자신만만함이 양제츠의 말 여기저기에서 묻어난다. 미국은 쇠퇴하고 이제 중국의 시대가 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관건은 경쟁과 적대 분야에서의 동력이 협력 분야에서의 동력보다 훨씬 강할 것 같다는 점이다. 설리번 안보보좌관은 앞으로 미·중 경쟁의 핵심은 경제와 기술이라고 말했다. 외교 분야 내에서도 미·중 간에 충돌하는 이슈들이 기후변화, 전염병, 비확산(이란과 북한)과 같은 협력 가능한 이슈들보다 많다. 여러 분야 중에서도 미·중 관계의 기본 성격을 가장 강하게 규정짓는 것은 이념 분야일 것이다. 그런데 앞 양제츠의 발언에서 보듯이 양측은 이념적으로 정면충돌한다. 바이든 대통령도 엊그제 기자회견에서 “이것은 21세기 민주주의 효용성과 독재체제 간 경쟁”이라고 말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중국과의 대결에서 미국의 가장 중요한 전략적 강점이 민주주의와 동맹이라고 본다. 민주주의는 미국의 힘의 근원이고, 동맹은 중국은 하나지만 미국은 55개국과 동맹을 맺고 있으니 이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민주국가, 동맹, 파트너들과 연합해서 중국, 러시아 같은 권위주의 국가들을 압박하고 국제질서의 룰을 지키게 하겠다는 것이다.
지금 중국은 이념과 인권문제에 신경 쓰지 않았던 트럼프 행정부 때보다도 훨씬 더 위기의식을 느낄 것이다. 그러면서 미국이 공산당 지배체제에 대한 레짐 체인지를 시도한다고 볼 것이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비슷한 권위주의 국가들과 연합하고 자국의 권위주의 모델을 전 세계에 확산시키려 한다. 그래야 중국 공산당체제를 보다 안전하게 유지할 수 있는 국제 환경이 조성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념 갈등의 심화가 미·중 관계의 성격을 압도적으로 규정하게 되면 경제, 군사, 외교 관계는 더욱 경색될 것이다. 그 경우, 양국관계는 이익 충돌 차원을 넘어서서 선악의 싸움으로 변질된다. 우발적 충돌 가능성도 커지고, 대만이 화약고가 될 가능성이 상당하다.
만일 냉전2.0 시나리오가 진행되면 한반도는 과거 냉전1.0 시대의 최전선 상황으로 다시 휘말려 들어갈 것이다. 남북관계는 더욱 치열한 대결 관계로 악화될 수 있다. 실질적 핵보유국 북한과 비핵국가 남한 간에는 냉전1.0 때보다 더 심각한 긴장이 조성될 것이다. 다만 북쪽에서 비핵화 및 경제발전에 매진하고 남쪽에서 초당적으로 대북협력을 시도하는, 한반도 차원의 대각성이 일어난다면 평화 공존의 길은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미·중 양국이 대결의 와중에서도 북핵 문제에 관해서 만큼은 아직 협력의 뜻을 버리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좁아진 외교적 입지 속에서 실낱같은 가능성의 영역을 모색해야 할 형편으로 한국은 몰리고 있다.
윤영관 전 외교부장관·서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