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목소리 컸지만, 주총 이변은 없었다

중앙일보

입력 2021.03.27 00:20

수정 2021.03.27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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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기홍 대한항공 사장이 26일 오전 서울 강서구 대한항공 본사에서 열린 ‘제59기 정기 주주총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 대한항공]

이변은 없었다.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은 경영권을 지켰고, 조원태 대한항공 회장도 승리를 거뒀다. LG그룹도 지주사 분할 승인을 받으며 지배구조 개편의 첫 단추를 뀄다. 경영권 분쟁, 계열사 분리 등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엇갈린 안건이 유독 많았던 올해 주주총회 시즌은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 발동, 의결권 자문사들의 적극적 개입으로 결과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대부분 기업 총수가 오너십을 지키는 데 성공하며 큰 변화 없이 주총 시즌을 마무리하는 모습이다.
 
‘수퍼 주총 데이’로 불린 26일, ㈜LG·SK이노베이션·금호석유화학·대한항공·우리금융지주 등 463개사가 일제히 주총을 개최했다. 3월에만 총 2084개 기업이 주총을 열었는데, 하루 기준 가장 많은 기업이 이날 주총을 열었다. 세간의 큰 관심을 모은 곳은 금호석유화학이었다. 박찬구 회장과 조카 박철완 상무가 경영권을 두고 한판 대결을 벌인 때문이다. 결과는 싱겁게 끝났다. 박 회장이 모든 안건에서 박 상무를 압도했다. 박 상무의 사내이사 선임 건은 물론 박 상무가 제안한 배당안(보통주 1만1000원)도 찬성률 35.6%로 부결됐다. 대신 박 회장 측이 제시한 주당 4200원 안이 통과했다. 이에 대해 개인 투자자들은 박 회장 손을 들어준 국민연금 등의 결정에 거세게 반발했다. 세계 최대 의결권 자문사 ISS와 국민연금이 모두 박 회장 측 손을 들어주며 승부가 갈렸기 때문이다. 박 상무는 경영권 분쟁 과정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했지만, 사내이사 진입에 실패해 경영권 재도전 여부가 불투명해졌다.

463개 기업 ‘수퍼 주주총회’
조원태 재선임 반대했는데 통과
금호석화 고배당 부결돼 개미 반발

온라인 생중계, 전자투표제 확대
법 개정으로 여성 사외이사 증가

한편, 지난해 약 7400억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한 금호석유화학은 지속가능한 발전을 이루기 위해 100% 이내인 부채비율을 더 낮추고, 50% 이상인 고부가 제품 비중을 더 늘리는 등의 청사진을 제시했다. 또 M&A 등으로 친환경 시장 진입도 적극 모색할 계획이다.
 
조원태 회장도 이날 대한항공 사내이사로 재선임됐다. 조 회장 사내이사 선임건은 찬성률 82.84%, 임채민 사외이사 선임 건은 찬성률 82.82%에 달했다. 국민연금은 사측이 제안한 조 회장과 임채민 사외이사 선임안에 반대 의결권을 행사했지만, 최대 주주 및 특수관계인의 지분율에는 미치지 못했다.


주요 기업의 주주총회 안건

한진그룹의 모기업인 한진칼 주총도 조용히 치러졌다. 조 회장과 경영권을 두고 싸워온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KCGI·반도건설 등 3자 주주연합은 주주제안을 포기하는 등 반대 의견을 내지 않았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합병을 추진하는 KDB산업은행이 한진칼 지분 10.66%를 취득하면서 조 회장 쪽으로 승기가 기울었다. ㈜LG 주총에서는 ㈜LX홀딩스를 인적분할하는 안건을 승인했다. 7.8%의 지분을 보유한 국민연금은 이 안에 대한 찬반을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다.
 
이날 주총을 연 하나금융지주도 김정태 회장의 1년 연임을 결정했다. 우리금융지주는 국민연금과 ISS의 반대에도 임기가 만료되는 5명의 사외이사를 교체 없이 그대로 재선임하는 안건을 올려 뜻을 이뤘다. 더불어 국내 2위 부호로 올라선 서정진 셀트리온 회장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기로 했다. 대신 이사회 의장을 장남 서진석 부사장에게 물려주고, 차남 서준석 셀트리온 이사에게는 계열사 통합 작업을 맡기며 경영권 승계 작업에 돌입했다.
 
유효상 숭실대 중소기업대학원 교수는 “스튜어드십 코드 등 제도 개선과 선진화로 국민연금의 목소리가 커지고 의결권 행사 사례가 늘었다”면서도 “사안마다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인 데다, 덩치에 걸맞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한편 올해 주총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온라인 생중계와 전자투표제가 크게 확대됐다. 또 전자투표제 도입으로 개인 주주들의 의결권을 행사도 활발해졌다.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경영 확산도 큰 틀의 변화다. 삼성·현대차 등 대다수 기업이 주총서 ESG 경영 확대 방안을 의결했다. 네이버 관계자는 “블랙록을 비롯한 글로벌 유수 투자자들은 ESG 요건을 충족하지 않을 경우 투자 비중을 줄인다”며 “기업들이 이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최근 분위기를 전했다.
 
여성 사외이사 선임도 크게 늘었다. 자산 2조원 이상인 상장법인의 경우 특정 성(性)으로만 이사회를 구성할 수 없도록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에 관한 법률(자본시장법, 2022년 8월부터 적용)’이 개정돼서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양성평등과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 등 요구가 지속가능 성장 기류와 비대면 의사결정 방식으로 방향성을 갖고 확대되고 있다”며 “해외 투자자 사이에도 ESG가 예민한 문제로 자리 잡고 있어 앞으로 이런 흐름은 더욱 강화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국민연금, 국내 주식 비율 조정 미뤄= 51거래일 연속 매도로 개인 투자자의 지탄의 대상이 된 국민연금은 이날 기금운용위원회를 열고 전략적 자산배분(SAA) 허용 한도를 현행 ±2%포인트에서 ±3~3.5%포인트로 늘리는 안을 검토했다(국민연금은 국내 주식투자 비중을 2016년 20%에서 올해 말 16.8%까지 낮추기로 했다). 그러나 위원회는 결론을 내지 못하고, 다음 달 7일 보궐선거 이후 논의를 재개하기로 했다.
 
김유경 기자 neo3@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