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 피해자 복수심은 본능, 악순환 끊는 ‘회복 시스템’ 절실

중앙일보

입력 2021.03.20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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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에이징 

“내가 살던 집 앞 골목의 군밤 장수를 죽여라.”
 
조선의 26대 왕 고종이 즉위한 뒤 내린 첫 번째 어명이다. 그는 계동의 군밤 장수가 다른 아이들에게는 공짜 군밤을 주면서도 자신에게는 한 번도 안 줬다며 죽어 마땅하다고 우겼다. 기겁한 대신들과 조대비가 나서 “전하, 성선의 덕으로 정치를 하셔야 하는데 어찌해서 주살(誅殺)의 위엄을 먼저 보이십니까”라고 만류하면서 결국 관철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고종의 표정은 어두웠다고 정환덕의 비망록 『남가록(南柯錄)』은 전한다.

피해 3배 이상 보복해야 분 풀려
학폭 등 당사자끼리 해결 힘들어

참회할 방법, 용서할 기회 제공
별도 사법 프로그램 운영 필요

12세 소년이 하루아침에 절대 권력자가 되면서 발생한 이 황당한 일화는 인간의 원초적인 이기심·자존감·분노·원한·폭력성·복수심 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우선 어린이도 모욕감을 느끼면 상대를 살해하고 싶을 정도의 극한 분노심을 느낀다. 피해 사실을 ‘어리니까 금방 잊어버릴 거야’라고 추측하는 것은 가해자나 주변 어른들이 가지는 가장 큰 오해다. 자신의 무기력한 처지를 아는 아이는 무심한 듯 행동하지만 표현만 못 할 뿐 깊은 상처를 안고 산다.


분노심이 쌓여 한이 되면 ‘기회만 되면 훨씬 더 심한 방법으로 갚아주리라’는 식의 과도한 복수심은 어린이도 품는다. 인류는 생존율을 높이기 위해 사소한 공격 징후도 심각하게 인식하게끔 진화해 왔기 때문이다. 가해자가 장난처럼 무심코 한 말, 경멸적 행동이 상대방 가슴에는 비수로 꽂힐 수 있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성공적인 복수가 주는 긍정적인 결과도 복수를 꿈꾸게 한다. 실제 응징을 받은 가해자는 나쁜 행동을 억제하게 되고, 피해자는 자부심과 명예를 회복하고 성취감과 만족감도 느낀다. 또 피해 보상도 받는다. 자연스레 복수는 개인적·사회적 폭력을 억제하는 수단으로 진화했고 신성한 의무로 여기는 문화도 생겨났다.
 
비록 반상의 구별이 큰 시대지만 고종이 모욕에 대한 보복 수단으로 사형을 요구했듯이 어린이 뇌에도 폭력적 성향은 작동한다. 폭력성은 학습을 통해 얻는 게 아니라 생존을 위해 타고난 동물적 본능이기 때문이다. 실제 인간은 두 돌만 돼도 자기 뜻대로 안 되면 소리 지르기, 물건 던지기, 발로 차기 등 폭력적인 행동을 보인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 사회에는 타인을 괴롭히는 가해자와 징벌적 복수를 갈망하는 피해자가 공존한다. 문제는 피해 상황에 대해 가해자와 피해자 간의 입장이 판이하게 다르다는 점이다. 개인적·사회문화적 차이는 있지만 통상 피해자는 가해자로부터 피해 수준의 3배 이상은 보상을 받아야 심리적 위로를 얻는다고 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식의 동해보복법(同害報復法)으로 유명한 『함무라비 법전』에도 ‘타인의 황소·양·나귀·돼지·배 등을 훔쳤을 때는 10배로 갚아야 한다’고 명시할 정도다. 또 신체 손상처럼 원상복구가 힘든 피해도 있다. 당사자들은 직접 문제를 해결하기 힘들며 협상이 결렬되면 복수의 악순환에 빠지기 쉽다.
 
따라서 피해나 분쟁 상황에서는 대표성을 가진 중재자나 공적인 시스템이 즉시 개입해 가해자의 진심 어린 ‘사과’와 충분한 ‘보상’을 통해 피해자의 ‘용서’를 구할 수 있어야 평화로운 결말을 기대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문명화된 현대 국가에서는 이런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는 걸까.
 
세계적인 석학 재레드 다이아몬드는『어제까지의 세계』에서 현대국가의 사법제도는 시민들의 사적인 보복을 금지하고 국가와 경찰이 가해자에게 폭력적인 보복을 대신함으로써 사회적 안정을 유지하는 게 목적이다 보니 위로, 보상, 정의 구현 등을 원하는 피해자의 개인적 이해를 충족시키기 힘든 경우가 많다고 지적한다. 원한을 풀지 못한 피해자들이 불법적인 방법으로 개인적인 보복을 저지르는 일이 지구촌 곳곳에서 발생하는 이유다. 그는 이런 부작용을 줄이는 해결책으로 사법 제도가 포용하지 못하는 부분을 별도의 ‘회복적 사법(restorative justice)’ 프로그램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피해자에게는 분노심을 표출할 기회를, 가해자에게는 잘못을 인정할 용기를 북돋워 주기 위해서다.
 
지금 우리 사회는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 인기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들의 학창시절 폭력에 대한 피해자들의 폭로가 이어지고 있다. 그들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제도권의 도움을 받기 힘든 피해자들이 SNS라는 일종의 사적인 보복 수단을 통해 한풀이하는 셈이다. 진위조차 모르는 3자들은 딱히 입장을 내놓을 상황은 아니다. 하지만 사적인 보복은 더 큰 폭력과 비극적 상황을 초래할 위험이 상존한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올드보이’는 고교생이 동창생 관련 추문을 무심코 내뱉은 탓에 해당 여학생은 자살하고 무자비한 개인적인 복수극이 초래되는 비극적 상황을 잘 보여준다.
 
과거에 발생했던 폭력 피해자들의 폭로 현상은 모든 분야에 걸쳐 한동안 지속될 것이다. 따라서 법적인 문제와 별개로 폭력과 관련된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를 중재해 줄 수 있는 한국판 회복적 사법 프로그램 운영이 필요해 보인다. 가해자는 참회할 용기가 없거나 방법을 몰라서, 피해자는 용서할 근거나 기회가 없어서 원한만 쌓아가는 사람들도 참으로 많다.
 
황세희 국립중앙의료원 건강증진예방센터장
서울대 의대 졸업 후 서울대병원에서 인턴·레지던트·전임의 과정을 수료했다. 서울대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미국 MIT에서 연수했다. 1994년부터 16년간 중앙일보 의학전문기자로 활동하면서 ‘황세희 박사에게 물어보세요’ ‘황세희의 남자 읽기’ 등 칼럼을 연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