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터 끝 납작해 면도도 가능한 ‘바리캉’

중앙일보

입력 2021.03.13 00:20

수정 2021.03.13 0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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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면서도 몰랐던 명품 이야기] 왈 트리머

중앙SUNDAY에 ‘윤광준의 생활명품’ ‘윤광준의 신 생활명품’을 연재한 사진가 윤광준씨가 세 번째 ‘생활명품’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영화 ‘마션’에서 지구 귀환을 앞둔 주인공(맷 데이먼)이 왈 트리머로 면도하는 모습.

겪어보지 못한 역병 대란으로 달라진 게 한둘이 아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오래 갇혀 있다 보니 답답하고 피로감은 쌓여간다. 급기야 우울증으로 번진 이들도 많다. 세상이 혼란해도 시간은 어김없이 흐른다. 때만 되면 허기를 느끼는 몸의 정직함은 변함이 없다. 수시로 먹거리를 주문하고, 그렇게 먹다 보니 느는 건 몸무게와 자성의 탄식 뿐이다.

100년 전통 미 이용기구 브랜드
단순하고 묵직한 디자인 돋보여
세계 유명 이발사들 필수 장비

영화 ‘마션’의 주인공 애장품
턱수염 많은 남성 관리하기 쉬워

돌아다니지 못해 쌓이는 짜증은 집 안에서 할 수 있는 일로 풀어야 한다. 만만한 게 음악 듣고 영화 보는 거다. 평소 벼르던 말러 교향곡 전 곡을 빠짐없이 들었다. 오전 10시쯤 시작해 저녁 때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했다. 평소라면 듣지 않았을 바인베르크의 현대 교향곡도 섭렵했다. 귀에 상처를 줄 듯한 날카로운 소리도 받아들인다. 덩달아 혹사당하는 늙은 탄노이 스피커가 안쓰럽기도 하다.
 
넷플릭스 영화를 보는 일도 잦아졌다. 봤던 영화 가운데 화성에 홀로 남은 우주인의 지구 귀환을 다룬 ‘마션’이 있다. 영화의 완성도가 높아 두 번이나 꼼꼼하게 보게 됐다. 앤디 위어의 원작 소설을 읽은 이들은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이론적 배경이 촘촘하게 깔린 소설의 행간을 영화가 다 채우지 못해서 일 것이다. 하지만 감독인 리들리 스콧이 누군가. 허술하게 영화를 마무리할 사람이 아니다. 치밀한 미장센으로 여느 영화와 배경이 전혀 다른 우주의 분위기를 사실감 있게 그려냈다.


마션은 진짜 화성이라 해도 믿을만한 요르단의 와디 럼 사막에서 찍었다. 실사로 묘사된 화성의 지형은 허구를 현실로 느끼게 한 중요한 이유가 된다. 미국 NASA는 이미 화성에 네 차례의 탐사 로버를 착륙시켰고, 얼마 전에는 지질 탐사용 로버 ‘퍼서비어런스’ 착륙에도 성공했다.  
 
감독의 선택은 고해상도의 사진과 데이터로 축적된 화성의 실체와 연구 결과를 근거로 했음은 물론이다. 곧 인간의 정착지가 될지도 모르는 화성을 친근하게 보여줬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주인공은 구출될 때까지 버틸 수 있는 최우선의 문제인 식량 조달을 감자 농사로 해결한다. 자신의 전공을 우주에서 써먹은 식물학자의 선택은 빛났다. 흙은 지구의 것과 다르지 않으니 다행이고, 화성에도 똑같은 햇빛이 비친다. 물은 화학적으로 합성하고 자신의 똥으로 거름을 줬다. 비닐하우스 농법을 그대로 적용시켜 길러낸 감자의 푸른 잎이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우주에서 농사를 지은 첫 인간의 뿌듯한 심정이 그대로 전이된 덕분일 것이다. 닥치면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는다는 희망의 메시지가 큰 울림이다.
 
지구로 돌아가던 아레스 3호는 동료의 구출을 위해 방향을 바꾼다. 지구 상공을 오가는 비행기도 아닌 우주선의 회항이 쉬울 리 없다. 지상의 천재 과학자들이 최단 거리로 이동해 만날 방법을 찾아낸다. 모선의 착륙 없이 주인공이 남겨진 화성 기지의 로켓을 이용해 궤도에서 도킹하기로 한다. 주인공이 해야 할 일은 기지 너머 수 천㎞ 떨어져 있는 탈출 로켓까지 가야 한다는 점이다. 이동하는 동안 홀로 고립되어 살아온 절망의 시간은 점차 희망으로 바뀌어 간다. 자신을 구출하러 온 동료와 만나기 전, 주인공은 가방에서 트리머(trimmer)를 꺼내 덥수룩해진 수염과 머리를 다듬기 시작한다. 생사가 걸린 긴박한 순간에 대한 묘사치곤 독특하다. 헝클어진 머리를 자르는 남자의 표정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이런 장면은 리들리 스콧 감독이 아니라면 어림도 없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인간은 자신의 모습을 신경 쓰고 있으며 존엄성을 지키고 싶어하는 심리 묘사는 탁월했다.
 

이발과 면도가 모두 가능한 왈 트리머. [사진 윤광준]

화면을 주의 깊게 보았다. 지퍼를 열고 조심스레 꺼낸 트리머에는 ‘WAHL’이란 상표가 선명했다.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평소 내가 쓰던 것과 똑같은 모델이었기 때문이다. 지구에서 쓰는 트리머와 개인용품을 넣는 가방이 그대로 나오는 영화의 한 장면은 사실일까. 사실 여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안 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평소 쓰던 왈 트리머의 익숙한 모습 때문에 이 장면을 놓치지 않고 기억한다.
 
나의 왈 트리머는 팔년 전 일본 교토의 한 양품점에서 찾아냈다. 그렇고 그런 가볍고 얍삽한 느낌이 없어 좋았다. 단순하고 무뚝뚝해 보이는 묵직한 디자인의 힘이다. 왈,월… 발음도 어려운 낯선 상표보다 ‘메이드 인 유에스에이’가 더 끌렸다. 메이드 인 차이나가 당연한 시대에 아직도 미국에서 만드는 물건이 있을까 의심했을 정도다. 나중에 알았다. WAHL은 100년 넘게 이용(理容)기구를 만들어온 전문 브랜드였다.
 
우리에겐 ‘바리캉’이라는 별칭으로 더 친숙한 물건이 트리머다. 왈은 세계의 내로라하는 바버(바보가 아니다. 이발사다)들의 필수 장비로 인정받은 지 오래다. 털이 많은 여느 미국 남자들의 상비품으로도 유용하다. 면도와 이발이 동시에 해결되는 신통방통한 재주 덕분이다.
 
수염은 조금만 자라면 면도기로는 쉽게 밀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왈은 커터 끝부분이 납작해(다른 트리머는 이 부분이 두꺼워 털이 짧게 깎기지 않는다) 면도 효과까지 낸다. 트리머 하나면 머리 전체의 털을 모두 다듬을 수 있다는 말이다.
 
난 이발소 신세를 지지 않고 이십 년 이상 살았다. 스스로 머리를 밀어 빡빡이가 되었고, 콧수염은 기르고 다녔다. 처음엔 트리머로 머리를 밀었고 수염은 전용 가위로 해결했다.
 
왈이 생긴 이후 털의 관리가 매우 쉬워졌다. 세면과 동시에 매일 머리와 턱수염을 민다. 중은 제 머리를 못 깎는다지만, 난 깎는다. 남의 손 빌리지 않아 좋고 시간도 절약시켜주는 왈 덕분이다. 에햄! 이래 봬도 난 우주에서도 쓰는 트리머가 있는 사람이라구.
 

윤광준 사진가

윤광준 사진가
충실한 일상이 주먹 쥔 다짐보다 중요하다는 걸 자칫 죽을지도 모르는 수술대 위에서 깨달았다. 이후 음악, 미술, 건축과 디자인에 빠져들어 세상의 좋고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게 됐다. 살면서 쓰게 되는 물건의 의미와 가치를 헤아리는 일 또한 삶을 풍요롭게 한다고 생각한다. 『심미안 수업』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