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80대 엄마에게 연하 남친이 생겼다

중앙일보

입력 2021.02.14 07:00

수정 2021.02.15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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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김명희의 내가 본 희망과 절망(46)

내게는 홀로 사시는 팔십이 넘은 엄마가 계시다. 엄마의 허리와 무릎이 너무 심하게 나빠진 후 무거운 과일을 지팡이 짚고 겨우 걷는 엄마가 사 드시기란 쉽지 않았다. 소액은 슈퍼에서 배달도 되지 않는다.
 
고민 끝에 인천 사는 내가 인터넷으로 엄마가 사는 지방 아파트 부근 농협이나 마트 과일 전문 가게 전화번호를 찾아 마땅한 곳을 물색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주기적으로 다양한 과일을 엄마 집으로 주문하고 내가 결재하는 시스템으로 돌려놓았다. 그러고 나니 내가 먹는 과일도 엄마 얼굴이 떠올라 목이 메는 일은 사라졌다. 나도 좋고 엄마도 좋은 일이다. 그만큼 나와 엄마가 나누는 전화는 횟수가 잦아졌다. 엄마 목소리가 한층 더 밝아지셨고 기분이 좋았다. 처음에는 과일이 싱싱한 게 배달되었다거나 이번 과일은 맛이 유난히 좋았다거나 요즘 막내딸 덕에 물 건너 온 과일까지 안방에서 받으니 호사를 누린다는 말씀이 전화의 대부분이었다.
 
그러다 언제부터인가 엄마와 나는 친구이상으로 터놓고 대화하는 시간이 늘어갔다. 그전에도 엄마와 막내딸인 나는 늘 사이가 돈독했다. 그러나 최근 우리 둘의 대화는 그보다 훨씬 멀리까지 나갔다 돌아오곤 한다.
 
“망측해라. 아이고 내가 무슨 노망인지 모르겠다. 딸에게 창피한 줄 모르고 별 말을 다하네.”


이제는 엄마와 딸인지, 오래전부터 만난 여고동창인지, 분간이 어려울 만큼 담장을 넘은 대화가 잦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글 쓰는 사람 아닌가. 늙고 젊음을 떠나 인간사 모든 것이 소중하고 고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엄마가 사는 아파트 부근 농협이나 마트 과일 가게 전화번호를 찾아 마땅한 곳을 물색했다. 그때부터 주기적으로 다양한 과일을 엄마 집으로 주문하고 내가 결재하는 시스템으로 돌려놓았다. [사진 pixabay]

 
엄마와 기탄없이 주고받는 이야기 중 하나는 노인들의 사랑에 대한 것이다. 작가인 나는 앞으로 갈수록 고령화로 치닫는 현시대에 대해 관심이 많다. 그렇다고 병원이나 은행 앞에서 지나가는 노인을 붙들고 시시콜콜 물어볼 수 없다. 이런 내게 팔십을 넘긴 엄마 연세를 사신 노인의 이성이나 사랑이야기는 중요한 대화였다. 엄마 본인 이야기가 아니지만 주변 그 또래 노인의 사랑을 많이 전해들을 수 있었다.
 
어떤 노인은 삼각관계로 고민하고, 어떤 노인은 짝사랑으로 애를 태운다고 했다. 또 어떤 노인은 이제 막 새로운 말벗을 만나 봄꽃처럼 얼굴이 핀 분도 있었다. 뜸을 뜨러 병원에 다니다 사이가 가까워진 연인도 있었다. 듣다보면 그분들의 주 대화는 운동 열심히 해 새봄에는 손잡고 꽃구경 가자는 것이었다. 또 어떤 경우는 한두 해 뜨거운 사랑을 나누고 서로 깊이 의지했다가 사랑했던 상대가 순간 큰 병으로 세상을 뜨기도 했다. 노인들의 사랑은 그것이 가장 큰 복병이었다.
 
또 어떤 경우는 혼자 사는 외로운 처지건만 이성친구는 꿈도 못 꾼다 했다. 그 이유는 자식들이 “민망하고 망측하게 무슨 짓이냐”, “자식 얼굴에 먹칠할 참이냐”, “늙어도 곱게 늙어라”, “노망이 들었느냐”, “다 늙어 무슨 사랑이냐”, “혹시 치매냐” 이렇게 몰아세워 도무지 용기를 못 낸다는 것이었다. 그 부분에서 나는 가슴이 너무 아팠다. 그런 말로 어른들 가슴에 비수를 꽂는 그 자식들도, 따지고 보면 오십대이거나 육십 대이리라. 본인도 늙어가면서 홀로 남은 엄마나 아버지의 적적함을 이해하기 그토록 힘든 걸까?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나는 좀 이해하기 어려웠다. 나는 오히려 홀로 사는 엄마에게 서로 말 벗이 되어줄 수 있는 남자친구를 사귀어보라 권하는 편이다. 어떤 날에는 남자의 심리는 이렇고 저렇고, 엄마도 여자니까 이렇고 저렇고…. 밑천도 별로 없는 나의 이성 상식을 엄마에게 들려주곤 한다. 내가 엄마를 응원하는 방법 중 하나는 또 있다. 요즘 젊은 층의 사랑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듯 노인의 사랑도 부끄러운 것이 절대 아니라는 말을 자주 해드린다. 흔하디 흔한 말 ‘몸은 나이를 먹어도 마음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 이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오십을 넘긴 내가 느끼기에도 이성친구는 필요하다. 나 역시 종종 외롭고 세상에 홀로 서 있는 듯한 느낌이 자주 들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식들이 효도하고 않고 와 별개 문제다. 옛 속담에 ‘효자 열보다 악처 하나가 낫다’고 하지 않던가.
 

얼마 전 나의 엄마에게도 봄이 찾아왔다. 멋진 남자친구가 생긴 것이었다. 들어보니 흥미진진하다. 어쩌면 20~30년 후 나와 당신의 이야기가 될 지도 모르는 미지의 사랑이야기. 황혼의 로맨스 아니던가. [사진 pxhere]

 
평생 자식 키우고 고생만 한 우리 부모세대가 나이 들어서는 자식들 눈총이 무서워 사랑도, 이성친구도 만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걸 알고 놀랐다. 노인들에겐 여름과 가을은 없었다. 이성이 있고 속삭일 수 있고 함께 웃을 수 있는 봄이 있거나, 홀로 쓸쓸히 짧은 인생 더 빨리 재촉할, 병들고 추운 겨울만 있을 뿐이었다.
 
얼마 전 드디어 나의 엄마에게도 봄이 찾아왔다. 멋진 남자친구가 생긴 것이었다. 들어보니 흥미진진하다. 어쩌면 20~30년 후 나와 당신의 이야기가 될 지도 모르는 미지의 사랑이야기. 황혼의 로맨스 아니던가.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할 시기에, 가슴에 담을 용기를 갖는 그 사랑은 어떤 것일까? 나의 엄마를 여자 친구로 두게 된 행운의 사나이는 네 살 연하의 남자로 과거 해병대 출신이란다. 나는 마치 내가 교제를 시작한 듯 기분이 들떴다. 평생 고생만 바가지로 하신 내 엄마가 아니던가. 앞으로 얼마나 남았는지 모를 그 여인의 인생에서. 자식들 멀리 있고, 각자 바쁘고, 그래서 문득문득 엄마가 외로울 때 그 손을 잡아줄 친구가 생겼다는 건, 최고급 침구세트보다 더 따뜻하고 아늑한 일일 것이다. 요즘은 엄마 전화가 더 잦아졌다. 행복한 사랑은 자랑해야 제 맛. 체면상 다른 곳에 말을 못하는 엄마가 내게 하루하루 있었던 일을 수줍게 털어놓는다. 나는 최대한 엄마가 덜 부끄러워하도록 배려하며 두 세 시간씩 들어드린다. 엄마가 이렇게 뒤늦게 사랑을 나누는 삶을 사신다니... 참 기쁜 일이다.


이글을 읽는 그대에게

당신은 늙은 부모의 새로운 사랑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물론 이 사랑은 불륜을 말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홀로 되신 분의 정상적인 사랑을 말한다. 혹시 ‘늙어 홀로 된 그대의 부모가 이성을 사귄다면’ 하고 상상해 본 적은 있는가? 한번 상상해 보길 바라고, 찬성인지 반대인지 하단에 댓글로 남겨줘도 좋겠다. 내가 곁에서 본 그들의 사랑은 우리의 그것보다 모자라지 않다. 그리고 나는 그대가 노인들의 봄과 겨울 두 계절 중에서 봄의 방향으로 걸어가도록 따뜻하게 응원해주면 좋겠다는 말을 하고 싶다.
 
“엄마, 오늘은 계단 몇 층까지 걸었어요? 오! 그래요? 얼마 전 2층도 못 오르던 분이 벌써 10층까지? 역시! 사랑의 힘은 놀랍군. 엄마, 올봄 꽃구경은 문제 없겠네요. 하하하. 엄마 그럼 이번 봄에 나는 두 분께 어떤 선물을 해드릴까?”
 
도 아니면 모! 그들의 계절은 봄 아니면, 겨울 뿐이다. 나는 지금 한 커플의 봄에 동행중이다. 물론, 투명인간으로.
 
시인·소설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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