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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우리에게 1년이 있는 이유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김명희의 내가 본 희망과 절망(45)

오랜만에 날씨가 풀렸다. 내 안의 건전지가 바닥이다. 햇살이 그리워 옥상으로 갔다. 저 멀리 인천항 바다가 은박지처럼 눈부시다.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은 나는 늘 일조량이 부족하다. 가끔은 일부러 옥상 벤치에 한 시간씩 앉아 태양을 충전한다. 겨울 강풍이 부는 날에는 털모자에 무릎담요 두 장을 챙겨 엘리베이터를 타고 옥상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나는 준비해간 뜨거운 커피를 내게 따라주며 인천항에 살고 있는 해풍과 수다를 떤다. 지난 한해도 수고했다고, 고생 많았다고. 이렇게 나 자신을 격려하다 보면 음악과 커피는 어느새 내 체온 깊이 스며든다. 세상에서 이보다 더 고요하고 평화로운 위로가 있을까. 지난 일 년을 숨 가쁘게 달려오며 나는 지칠 때마다 옥상에서 나를 돌아보곤 했다. 오늘은 어제 내린 눈이 흰 원고지처럼 나를 반긴다. 누군가 먼저 다녀갔는지 한쪽에 작은 눈사람 둘이 서로에게 어깨를 내주고 있다. 하얀 아이들과 눈인사를 하고, 발자국으로 꾹꾹 적어보는 유통기한 지난 낱말들.

‘실수, 추락, 절망, 위로, 의리, 반성, 거울 보듯 인정하기, 힘들어도 시간 견디기, 두려움과 맞서기, 진짜 내 편과 남의 편, 용기, 제로에서 재도약, 숨 가쁘게 해치웠던 무수한 원고들, 몇 개의 심사, 몇 개의 수상 소식, 하늘에게 묻다, 하늘에게 듣다, 그래도 나는 나, 혼자라도 괜찮아, 지지 않는 불꽃, 그래서 나는 나, 천천히! 그러나 불꽃처럼! 다시.’

누군가 먼저 다녀갔는지 한쪽에 작은 눈사람 둘이 서로에게 어깨를 내주고 있다. 하얀 아이들과 눈인사를 하고, 발자국으로 꾹꾹 적어보는 유통기한 지난 낱말들. [사진 unsplash]

누군가 먼저 다녀갔는지 한쪽에 작은 눈사람 둘이 서로에게 어깨를 내주고 있다. 하얀 아이들과 눈인사를 하고, 발자국으로 꾹꾹 적어보는 유통기한 지난 낱말들. [사진 unsplash]

2020년, 365일이 몇 개의 낱말로 추려지고 있었다. 작년이라는 강풍을 온몸으로 버티며 차곡차곡 채웠던 저 쓰린 키워드들. 모든 일이 나와 시선을 맞추듯, 흰 눈 위에 쏟아졌다. 마치 강제로 꽉 잠가놔서 실컷 울지 못했던 어느 집 수도꼭지처럼 낱말들이 한참 울었다. 내게 있어 작년은 대체로, 추락과 비상을 반복했던 해다. 그것은 코로나 때문이 아니었다. 코로나보다 사람이 내겐 더 큰 악몽이었고 아픔이었다. 내 정신은 치열하게 아팠고 육신은 단단해졌으며 그만큼 또 성장했다. 성장통엔 굳은살이 없다. 아무리 겪어도 처음처럼 강적이다.

이제 다시 짐을 꾸려야 할 때. 2021년 새해가 시작되고 보름 넘게 지났다. 성경에 나오는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문구를 생각한다. 정말 나는 새 부대를 준비했나? 오늘 우연히 어느 유튜브에서 한 여자의 상담을 듣게 되었다. 다소 목이 쉰 중년 여자는 자신의 생이 너무 힘겨워 상담 신청을 했다며 사연을 이어갔다. 내가 들어보니 그리 큰 문제로 보이지 않았다. 사는 게 그 정도만 돼도 걱정 없겠다는 생각. 심지어 그녀가 부럽기까지 했다.

이런 내가 갑자기 낯설었다. 해는 바뀌었는데, 여전히 동일한 걱정을 하는 나. 분명 달력도 바뀌고 하늘의 태양도 바뀌었는데, 나만 달라진 게 없었다. 우리는 길을 가다 종종 싱크홀을 만난다. 그보다 더 깊고 크고 답이 없는 싱크홀은 우리 마음속에 있다. 우리 안에 깊이 자리한 걱정과 불안의 늪은 한번 빠지면 벗어나기 어렵다. 그랬다. 새해가 시작됐어도 아직 과거의 싱크홀에서 나오지 못하는 나를 보았다. ‘2021년 신축년(辛丑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신년인사는 무수히 보내고 받았어도, 막상 내 안에 새로운 복을 담을 공간은 만들지 못했다.

아주 오래전, 해를 일 년씩 나눈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일 년이란 단위로 삶을 자른 이유도 1년마다 걱정을 끊고 고치고 다시 가라고 선을 그어놓은 것은 아닐까? 한해를 살며 치석처럼 우리 삶 곳곳에 쌓인 단단한 찌꺼기들. 해가 바뀔 때마다 걱정·분노 애증·슬픔·불행을 대청소하고 벗어나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그동안 단 한번도 걸어보지 않은 길, 정성껏 포장된 시간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사진 unsplash]

그동안 단 한번도 걸어보지 않은 길, 정성껏 포장된 시간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사진 unsplash]

언어를 다루는 직업을 가진 내가 ‘새롭다’는 낱말을 사전에서 처음 찾아봤다. “새롭다: 지금까지 있은 적이 없다. 새롭다: 전과 달리 생생하고 산뜻하다.”

우리에게 누구도 뜯지 않은 새 시간이 주어졌다. 아직 묵은 뭔가를 다 못 버렸다면 바로 지금 버리자. 그동안 단 한 번도 걸어보지 않은 길, 정성껏 포장된 시간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이제 우리는 눈부신 새 길로 가는 것이다. 참 신나는 일이다.

새해를 살아갈 주인이 나인지 아닌지 바로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바로, 새로운 해를 내가 앞에서 끌고 갈 준비가 되어 있는지 나 자신을 보는 것이다. 뒤에서 억지로 질질 끌려갈 사람은, 새해 1월인 지금도 맨 뒤에서 서성일 것이다. 그러나 새해의 주인이 되기로 작정한 사람은 절대 뒤에 서지 않는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2021년, 올해는 그 어느 때보다 내가 주인이 되어 달려볼 생각이다. 앞에 설 작정이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기로 했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어 사는 법? 그것은 뒤가 아니라, 맨 앞에 서는 것뿐이다.

2021년, 아직 과거에서 못 나온 사람이 없길 바란다. 벌써 시간이 저만치 앞서 달린다. 나는 올해 내 평생 가장 가벼운 마음의 신발을 신었다. 운동화 끈을 바짝 멘다. 자! 모두 출발이다.

시인·소설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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