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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가을이 붉은 것은 누군가의 열꽃 때문일까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김명희의 내가 본 희망과 절망(44)

“예쁜 딸, 잘 다녀와. 그간 쌓인 피로도 실컷 풀고.”

여행 가는 딸아이를 배웅하고 엘리베이터 앞에서 돌아선다. 텅 빈 집으로 들어와 차이콥스키의 피아노협주곡 1번을 크게 튼다. 때로는 격정적이고 때로는 감미로운 선율이 나와 하나가 되는 시간이다. 무엇부터 할까? 하다가 며칠 미뤄왔던 청소기를 꺼낸다. 집안 곳곳에 낙엽처럼 떨어진 쓸쓸한 먼지와 머리카락들. 가을바람에 휩쓸리듯 흡입구로 일제히 빨려 들어간다. 흩어진 옷가지를 정리하는데, 전화가 걸려온다. 내가 아는 여든이 넘은 여성의 목소리다.

가을이 달력 속으로 깃든 지 얼마 안 된 최근. 나는 세 여자의 실연과 사랑의 갈등을 보았다. 그중에서도 80대 여인의 실연은 남달랐다, 이별의 슬픔이 내 몫이 되어 전화기 저쪽에서 오래 흘러들었다. 축축한 눈물과 한숨, 마치 분무기로 물을 뿌린 듯 내 귀에 묻어나는 젖은 목소리. 팔십 줄 황혼의 그녀가 이 가을보다 더 붉게 열꽃을 피우고 있었다.

단풍의 붉은 빛은 언제나 경이롭고 아름답다. 그러나 그 빛은 어쩌면 일교차에 찢긴 초록이 지르는 비명일지도 모른다. 어떤 아픔과 비명이 때론 이런 아름다움이 될 수도 있다니. 참 난감한 일이다. 이 세상 그 어떤 사랑인들 눈부시지 않으랴. 또한 그 어떤 실연인들 아프지 않으랴. 그러나 육십이라는 숫자에 아직 가 닿지 못한 내가 바라본 노년의 사랑은 단풍보다도 아름다웠고 그들의 이별 또한 유독 붉고 남다르게 다가왔다. 젊음도 건강도 여유롭지 못한 황혼의 사랑은 서로를 더 의지하기에 실연의 파장도 컸다. 한쪽 팔을 내어주며 팔짱을 끼고 천천히 공원을 빠져나가는 등 굽은 사랑은 석양 노을처럼 아름답고 늦가을 서리꽃처럼 눈물겹다.

단풍의 붉은 빛은 언제나 경이롭고 아름답다. 그러나 그 빛은 어쩌면 일교차에 찢긴 초록이 지르는 비명일지도 모른다. [사진 pixnio]

단풍의 붉은 빛은 언제나 경이롭고 아름답다. 그러나 그 빛은 어쩌면 일교차에 찢긴 초록이 지르는 비명일지도 모른다. [사진 pixnio]

저만치 걷다가 문득 돌아보면, 노년 남녀의 어깨는 한없이 낮았다. 힘이 빠진 걸음걸이는 아슬아슬하기까지 하다. 그래서일까? 황혼의 사랑은 유독, 잡은 두 손을 좀처럼 놓는 법이 없다. 물론, 번쩍 업어주고 서로를 향해 쌩쌩 달려가는 사랑. 펄쩍 뛰어 목에 매달려 안기고 빙빙 돌려주고 화창하게 웃는 청춘의 푸른 사랑도 곱다.

그러나 황혼의 사랑은 그것과 아주 다르다. 노년의 사랑은 서로의 보행기가 되어주는 사랑이다. 서로의 속삭임을 서두름 없이 들어주고 상대의 우울함을 뽀송뽀송하게 말려주는 느린 사랑. 이 가을 그런 황혼의 사랑을 본 적이 있다. 어느 한쪽이 손에서 놓친 지팡이를, 다른 한쪽이 말없이 집어서 고요히 건네주는 특별하고 조용한 사랑이었다. 그런 사랑이 갑자기 실연이 될 때 둘은 참으로 많이 힘들어했고 많이 우는 모습을 보았다.

요즘, 눈가가 짓무를 정도로 우는 사랑과 이별이 어디 흔하랴. 삶의 마지막에서 뜻하지 않게 다가온 사랑이니 얼마나 소중했을까. 이승의 쓸쓸함 끝에서 ‘그래, 이제는 다 살았지’ 하며 온종일 빈 집에 홀로 남아, 가슴의 전등을 끄고 체념하다 이삭줍기처럼 문득 만나 깊어지는 노인의 사랑. 남은 날이 짧아서 더 애틋한 사랑. 애지중지 의지하고 기대었던 그 자리가 어느 날 갑자기 텅 비어버릴 때 겨울 들판에 혼자가 된 나무들은 유독 작은 바람에도 휘청거렸다.

듣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차이콥스키의 피아노협주곡 1번에는 사랑의 기쁨과 향수와 괴로움이 동시에 들어있다. 이 음악이 초연되었다는 150여 년 전 러시아의 가을은 어떠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그때도 누군가는 불어오는 가을바람 속을 낙엽처럼 떠다녔으리라. 그곳에서도 백발의 남녀들이 코트 깃을 세우고 블라디보스토크 혁명광장을 가로지르며 이 피아노 선율처럼 빠르거나 느린 사랑을 나눴겠지. 저마다의 향수를 떠올리거나 낭만의 미소를 얼굴에 드리웠으리라. 낙엽처럼 그윽한 커피를 손에 들고 애틋했던 그녀 눈처럼 깊어진 하늘을 한껏 응시했으리라. 비록 얼굴과 목에 주름이 가득해도 그 안에 담겼던 사랑은 푸르고 아름다웠으리라. 그런 그녀의 떠나간 주홍 립스틱을 그리워했을지도 모르리라. 사랑에는 나이가 없다는 말, 정말 맞다. 며칠 전 그녀가 내게 말했다.

노년의 사랑은 서로의 보행기가 되어주는 사랑이다. 서로의 속삭임을 서두름 없이 들어주고 상대의 우울함을 뽀송하게 말려주는 느린 사랑. 이 가을 그런 황혼의 사랑을 본 적이 있다. [사진 pxhere]

노년의 사랑은 서로의 보행기가 되어주는 사랑이다. 서로의 속삭임을 서두름 없이 들어주고 상대의 우울함을 뽀송하게 말려주는 느린 사랑. 이 가을 그런 황혼의 사랑을 본 적이 있다. [사진 pxhere]

“그 할아버지 나이는 여든네 살이었지만 나를 부를 때 항상 ‘자기야~’라고 불러주었어요. 그런데 이젠 내 곁에 없어요. 2년간의 사랑과 추억만 남았어요.”

‘자기야~’라는 말…. 나는 이 속삭임을 언제 들어봤지? 전생처럼 까마득하다. 그동안 나와는 상관없는 언어로 치부하며 살았던 ‘자기야~’ 라는 이 말. 참으로 부럽고 아득한 핑크빛이다. 오십 초입인 내가, 80을 넘긴 그녀의 사랑과 실연까지 부러웠던 순간이다. 그리고 깨달았다. 사랑은 인생이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것을. 오늘 문득 떠오른 생각. ‘나도 다시 사랑할 수 있겠지?’ 사랑은 언제든 다시 시작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가을에게 듣는다.

청소를 마친 나는 차이콥스키의 피아노협주곡 1번을 서서히 줄인다. 그 자리에 커피 한잔과 함께 파헬벨의 우아함, 세레나데를 가만히 튼다. 눈을 감는다. 음악처럼 은물결 찰랑거리는 푸른 호수 안쪽으로 들어간다. 떨리게 사랑하는 사내와 미소 지으며 천천히 노 저어 가는듯한 이 기분. 거실로 파고드는 햇살 볼륨을 좀 더 줄인다. 이 가을, 가장 예쁜 드레스를 입고서 머리에는 장미꽃을 달고 사랑에 빠질 여인들. 잠시 눈을 감고 그녀들과 이 세레나데를 듣는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인들이여, 부디 백 살까지 사랑하고 사랑받고 행복하시라. 나도 그렇게 살 작정이다.

시인·소설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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