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살아야만 법적 보호를 받는 게 구시대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법의 테두리 안에 못 들어간 저희도 세금은 다 내고 있잖아요."
4년째 동거 중인 백팩(활동명·30)과 킴(활동명·33)은 '내 가족이 사회안전망 안에 들어와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이들은 20만 구독자 유튜브 채널 '망원댁TV'를 운영하는 동성 커플이죠. 동성 간 결혼을 허용하지 않는 한국에선 이방인 같은 존재입니다.
법적으론 남남이지만 둘에겐 서로가 상대방을 돌보며 살아가는 '가족'입니다. 이처럼 결혼과 출산이란 테두리를 벗어나 각자의 방식으로 가족을 꾸리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밀실] 2021 신(新)가족의 탄생
다양한 가족들의 새해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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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서운하게 엄마 닮아" 살가운 말이 비수로
11살 딸 아정이와 사는 미혼모 정수진(40)씨는 지하철 타고 나들이 갈 때 종종 난감한 상황에 처합니다. 같은 칸에 탄 어른들이 아정이를 보며 "아빠 서운하게 엄마 쏙 빼닮았네. 아빠 빼놓고 엄마랑 어디 가?"라고 말을 걸 때죠. 정씨는 "아이 아빠가 당연히 있을 거라 전제하고 살갑게 건네는 말이 더 힘들 때가 있다"고 전했습니다.
하지만 성인이 돼 홀로서기에 나선 신씨는 외롭지 않다고 했습니다. '보육원 친구들, 사회복지사 선생님들'이 모두 가족이기 때문이죠.
동거 가구 설움 "내 집 마련, 수술도 어려워"
혈연·혼인에 묶인 지원책 탓에 주거 안정의 꿈은 멀어집니다. 20대 초부터 4명의 파트너와 동거한 작가 정만춘(필명·34)씨는 "행복주택을 신청할 때 혼인 신고 안 하면 대개 10평이 안 되는 1인 청년 주택밖에 신청할 수 없다. 둘이 살기엔 좁은데 더 넓은 평수는 신혼부부들만 신청할 수 있어 아쉽다"고 밝혔습니다.
4년 전 심혈관 질환으로 수술받았던 킴은 "병원에서 같이 있고 싶은 사람은 백팩(애인)이었는데 '직계 가족만 보호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을 들으니 차별처럼 느껴졌다"고 말했습니다. 백팩도 "만약 킴이 하루아침에 잘못된다면 연락도 못 받고 장례식장이 어딘지도 모를 거라 생각하니 무서웠다"고 털어놨죠.
흔들리는 전통 가족 "구체적 대안 필요"
정부도 변화를 감지하고 법과 제도를 손질하려 합니다. 지난달 26일 여성가족부는 정부 정책에서 비혼·동거 등 가족 범위를 확대하는 법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정재훈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정부가 전통적 가족 프레임에서 벗어나는 점은 의미가 있다"면서도 "이제 계획을 어떻게 구체화할지 그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김순남 가족구성권연구소 대표는 "원하는 형태로 가족을 구성하는 것도 개인의 권리다. 개인이 존엄하게 살 수 있는 방향을 국가가 고민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습니다.
박건·백희연·최연수·윤상언 기자 park.kun@joongang.co.kr
영상=이진영·조예진 인턴, 백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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