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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증명할 필요 있나"…결혼 대신 계약서 남기는 '비혼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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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에서 만난 줄리앙은 ‘내가 널 사랑하는데 다른 사람에게 증명할 필요가 있을까. 난 결혼을 믿지 않는다’고 했어요. 줄리앙을 새로운 룸메이트로 맞이하기로 했죠.”

『팍스, 가장 자유로운 결혼』의 이승연(34) 작가는 남이 만든 기준을 행복의 잣대로 삼고 싶지 않았습니다. 줄리앙과 결혼 대신 ‘팍스(PACS)’를 맺은 이유입니다. 5년간의 동거생활을 거쳐 서로에 대한 확신을 가진 뒤에야 결혼에 골인했죠.

이씨와 당시 남자친구이던 줄리앙씨와의 팍스 계약서. 두 사람의 서명이 담겨 있다. 이씨 제공

이씨와 당시 남자친구이던 줄리앙씨와의 팍스 계약서. 두 사람의 서명이 담겨 있다. 이씨 제공

한국에선 생소한 팍스는 1999년 프랑스가 도입한 ‘시민연대계약’의 일종입니다. 이씨가 사는 프랑스에선 결혼 대신 팍스를 통해 가족이 되는 경우가 늘고 있죠. 팍스로 맺어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고도 부부와 같은 법적 지위를 누릴 수 있습니다. 프랑스 내 ‘팍스 가족’은 19만명(2019년 기준)을 넘어섰습니다.

동거가 익숙한 프랑스에선 한국처럼 ‘결혼해야 같이 살 수 있다’는 인식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이씨는 “동거하다 아기가 먼저 생기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 팍스를 해야 하나, 결혼해야 하나 고민하기도 한다”고 설명합니다.
# 프랑스에서 직접 경험해본 이승연씨의 ‘팍스’, 자세한 내용은 영상으로 확인하세요. 

독일도 2001년 팍스와 비슷한 ‘생활동반자법’을 제정해 동거 커플에게 가족의 권리와 부양 의무, 채무 연대 책임 등을 부여했습니다. 이웃 나라 일본의 지자체들도 생활동반자 제도를 도입하고 있습니다. 2015년 도쿄 시부야구는 ‘파트너십 증명제도’를 통해 구 내에서 동거하는 두 성인을 법률상 혼인에 상응하는 관계로 인정해줬죠.

‘서로 지지·부양하는 공동체’ 가족의 재해석

피로 맺어진 사이.
가족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죠.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전통적 의미는 옅어져 갑니다. 세계적으로 ‘가족’이란 단어는 재해석되고 있습니다. 서로를 정서적으로 지지하고 부양하는 공동체는 모두 가족이라는 거죠. 팍스의 등장도 가족의 의미 변화와 맞물려 있습니다.

한국은 어떨까요. 현행법은 ‘혼인과 혈연, 입양으로 맺어진 관계’로 가족을 정의합니다. 그러나 피와 결혼으로 묶이지 않은, 새로운 형태의 가족이 늘고 있습니다. 결혼 대신 동거를 택하는 비혼족(族), 동성끼리 같이 사는 커플,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1인 가구 등인데요. 혼자 사는 1인 가구의 비율도 30%를 훌쩍 넘겼죠.

연도별 1인 가구 수 추이 그래픽 이미지. [자료제공=통계청]

연도별 1인 가구 수 추이 그래픽 이미지. [자료제공=통계청]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법적으로 가족이란 테두리에 묶이지 않다 보니 진짜 필요한 순간, 서로를 위해 있어 줄 수 없다는 겁니다. 4년째 함께 사는 동성 커플인 백팩(활동명·30)과 킴(활동명·33)이 그런 상황이었죠. 몇 년 전 심혈관 질환으로 수술받았던 킴은 “수술을 해야 하는 병원에서 ‘직계 가족만 보호자가 될 수 있다’고 해 난감했다”고 밀실팀에 털어놓았습니다.

1인 가구·초고령사회···현실이 된 가족 위기

“장례를 치러주고 싶어도, 권리가 지정돼 있지 않은 이상 힘들죠. 법적 가족이 아니니까.”

김순남 가족구성권연구소 대표는 노인 1인 가구가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합니다. 보건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고독사의 절반 가까이(43%)는 65세 이상 노인입니다.

노인 1인 가구의 수는 청년의 세 배에 달합니다. 나이가 들면 새로운 가정을 꾸리거나 경제 활동에 나서기가 어려워지는 데다 고령화 시계가 빨라지면서 노인 1인 가구는 갈수록 늘어납니다.

노인 1인 가구는 갈수록 늘어난다. [중앙포토]

노인 1인 가구는 갈수록 늘어난다. [중앙포토]

『외롭지 않을 권리』를 쓴 황두영 작가는 “노인 1인 가구의 경우 충분한 임대주택을 받지 못 하는 실정”이라고 꼬집습니다. 그는 “이분들이 마음 맞는 친구들과 가족이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고독사를 눈에 띄게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청년 가구도 주거 등에서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어요. 에세이 작가 정만춘(필명·34)씨는 “혼인 신고를 하지 않은 동거인들은 1인 청년주택 밖에 신청하지 못한다. 대개 10평 안 되는 작은 주택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죠. 가족은 혈연이나 혼인으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오히려 더 많은 사람이 고독으로 내몰리는 겁니다.

진전되는 논의, 여전한 현실의 벽

때문에 ‘생활동반자법’을 도입하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합의를 통해 생활동반자 관계를 형성한 이들에게 결혼한 배우자와 동일한 세제 혜택을 주고, 가정폭력으로부터 보호받도록 하는 거죠. 황씨는 “가족 제도의 위기는 기후변화처럼 직접 맞닥뜨리기 전까진 모른다”며 “출생과 혼인이 그 어느 때보다 적은 지금이야말로 제도를 개선하고 바꿔야 할 때”라고 주장했어요.

정부도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습니다. 지난달 26일 여성가족부는 가족 범위를 확대하는 법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갈 길은 멀게만 느껴집니다. 일부 종교계에서 생활동반자법을 ‘동성애를 위한 법’이라고 주장하며 반대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생활동반자법이 통과되면 동성 커플도 가족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하지만 프랑스의 경우 팍스를 맺은 커플의 90% 이상이 이성애자입니다. ‘동거의 법적 인정=동성애 조장’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게 생활동반자법에 찬성하는 이들의 설명입니다.

자유민주주의연합 관계자들 2020년 12월 9일 오후 서울 중구 명동성당 앞에서 '교황청의 동성 결합 지지 규탄 기자회견'을 열고 최근 '시민결합법' 지지를 선언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행보와 관련해 염수정 추기경의 입장 공개를 촉구하고 있다. [뉴스1]

자유민주주의연합 관계자들 2020년 12월 9일 오후 서울 중구 명동성당 앞에서 '교황청의 동성 결합 지지 규탄 기자회견'을 열고 최근 '시민결합법' 지지를 선언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행보와 관련해 염수정 추기경의 입장 공개를 촉구하고 있다. [뉴스1]

“개인 행복해야 사회도 행복” 진짜 위기 피할까

“국가가 ‘이 사람들끼리만 서로 돌봐. 이 사람들끼리만 서로 삶을 나누고 정서적으로 지지해’라고 정하는 건, 웃기지 않나요?”

김순남 대표는 묻습니다. “개인이 존엄하게 살 수 있는 방향을 국가가 이젠 고민해야 할 때”라는 겁니다.

전문가들은 ‘새로운 가족’이 살아갈 방법을 내놓지 않으면, 우리 모두에게 가족 제도의 진짜 위기가 곧 닥칠 거라고 입을 모읍니다. 김 대표는 “누군가를 혐오하고 차별하지 않는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원하는 가족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는 개인의 권리도 지킬 수 있다” 고 말합니다.

이씨는 한국 사회가 달라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제 책을 읽고 몇몇 어르신들은 ‘좀 이해가 된다’고 하셨어요. 자신이 원하는 방향을 선택해 행복해진 개인들이 많아진다면 그 사회도 곧 행복해질 거라고 봐요.”

우리 주변의 다양한 가족들, 법으로 모두 인정해야 할까요.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백희연·박건·최연수·윤상언 기자 baek.heeyoun@joongang.co.kr
영상=이진영·조예진 인턴, 백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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