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상륙작전 감춰진 비극···학도병 718명은 '버리는 돌'이었다

중앙일보

입력 2021.01.18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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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덕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 상륙작전에 투입됐던 문산호 실제 모형을 재현했다. 2020년 6월 개장했다.

인천상륙작전은 알아도 장사상륙작전은 모른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뒤에 장사상륙작전의 희생이 있었다는 건 더 모른다. 무엇보다 인천이 어디에 있는지 다 알지만, 장사가 어디에 붙어있는지는 정말 모른다. 
 
경북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 해변. 1950년 9월 14∼19일 한국군 상륙 부대가 북한군과 격전을 벌인 전승지다. 지난해 이 해변 남쪽 끝에 거대한 군함이 들어섰다. 이름하여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 상륙작전에 투입됐던 ‘LST 문산호’의 실제 모형을 재현한 기념관이다. 지난해 6월 5일 개장했고 11월 16일 정식 개장식을 했지만, 코로나 사태로 한두 달 문을 닫았고 홍보도 제대로 못 했다. 그럼에도 알음알음 방문한 사람이 8만8000명에 이른다(2020년 12월 31일 기준). 
 
전승지(戰勝地)란 싸움에서 이긴 곳을 뜻한다. 과연 장사리는 승리의 현장인가. 장사 해변에 상륙한 한국군 772명 중 718명이 학도병이었다. 이들 소년은 입대한 지 18일 만에 작전에 투입됐다. 상륙작전 공식 전사자만 139명이고 부상자는 92명이다. 무엇보다 소년들은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기만 작전인 줄 모르고 장사리에 상륙했다. 소년들이 동해안에 상륙한 이튿날, 연합군이 인천에 상륙했다. 그들은 인천상륙작전의 희생양이었다. 영덕군청의 관련 기록과 전승기념관의 전시자료를 토대로 장사상륙작전을 재구성했다. 
 

명부대  

영덕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공원. 학도병 조각상 뒤로 문산호 모양의 전승기념관이 보인다.

낙동강 전투가 한창이던 1950년 8월 27일. 육군본부 직할 독립 제1유격대대가 창설됐다. 대대장이 이명흠 대위다. 그는 사흘 전 직접 대구역 광장에 나가 대원을 모집했다. 현장에서만 560명이 모였다. 대부분 대구 지역 학생이었다. 제1유격대대는 대대장 이명흠의 이름 가운데 글자를 따 ‘명부대’라 불렸다. 


명부대는 8월 27∼30일 경남 밀양에서 기초군사훈련을 했다. 밀양에서도 학도병을 모집했다. 명부대 대부분이 대구와 밀양의 학생인 까닭이다. 명부대는 9월 1일 부산으로 이동해 훈련을 이어갔다. 9월 10일 육군본부가 작전명령 174호를 내렸다. 주요 임무는 다음과 같았다. ‘9월 13일 동해안 영덕지구로 상륙해 북한군 제2군단의 후방을 교란하라.’  
 
9월 13일 오전 부산 육군본부 연병장. 정일권 육군참모총장, 신성모 국방부 장관 등 한국군 최고 수뇌부가 참석한 가운데 출정식이 열렸다. 군 최고 수뇌부가 출정식에 참석했다면 매우 중요한 작전이었을 텐데, 작전에 투입된 병력의 93%가 16∼19세 소년이었다. 소년들이 군인이었던 기간은 길어야 18일이다. 그들에겐 군번도 계급도 없었다.  
 

상륙작전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에서 전시 중인 상륙작전 현황 모형. 문산호가 좌초돼 입안하지 못하자 병사들이 나무에 줄을 묶어 상륙작전을 감행했다.

13일 오후 2시 부산항. 제1유격대대가 ‘LST 문산호’ 탑승을 시작했다. LST 문산호는 1943년 건조된 2366t급 상륙함이다. 문산호 탑승 절차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계속 늘어졌다. 미군이 우르르 문산호에 탔다가 내리길 반복했다. 명부대도 덩달아 배를 탔다가 내렸다. 어느 순간 문산호에 명부대만 남았다는 걸 알아챘을 때 배가 출발했다. 장사상륙작전이 연합군도 투입되는 대규모 상륙작전인 것처럼 위장 전술을 쓴 것이라는 사실을 소년들은 꿈에도 몰랐다.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 갑판 위 전경. 실제 문산호를 재현했다.

14일 오전 4시 30분. 문산호가 장사리 앞바다에 도착했다. 마침 태풍 ‘케지아호’가 불어닥친 날이었다. 폭풍우가 내렸고, 3∼4m 높이의 파도가 들이쳤다. 해안 지형에 어두운 문산호는 끝내 수중 모래톱에 좌초했다. 해안에 접안하지도, 바다로 돌아가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이명흠 대위는 부대 상륙을 명령했다. 북한군의 포화 속에서 대원들이 바다로 뛰어들었다. 적의 총탄에 쓰러진 소년도 많았지만, 바다에 휩쓸려간 소년도 많았다. 명부대가 받은 작전명령에는 상륙작전 직전 항공기 폭격과 해군 함포사격이 실시된다고 나와 있었다. 그러나 악천후 때문인지 폭격은 없었다.  
 
자격 미달 소년들을 상륙작전에 투입한 것이 첫 번째 잘못이었다면, 현장 상황을 면밀히 살피지 않고 작전을 결행한 것이 두 번째 잘못이었다. 아니다. 어차피 소년들은 인천상륙작전의 사석(捨石)으로 투입되었다. 바둑에서 버리는 돌은 가벼워야 한다. 명부대 안에서 작전명령 174호의 진짜 목적이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기만이란 걸 알고 있었던 사람은 이명흠 대위를 비롯한 극소수 간부뿐이었다.
 

장사리의 소년들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 안에 있는 전시물. 소년들이 추위와 굶주림, 공포 속에서 떨고 있는 모습이다.

14일 오후 2시 50분. 명부대는 약 8시간 30분 만에 장사리에 상륙했다. 북한군의 200고지도 점령했다. 정예 병력이 나무에 밧줄을 묶어 상륙작전을 이끌었다. 북한군이 반격하기 전에 돌아가면 성공인데, 문제가 생겼다. 돌아갈 배가 없었다. 상륙작전 중에 무전기가 망가졌고 통신병도 전사했다. 
 
부산에서 출발하기 전 명부대엔 소련제 모신나강(Mosin Nagant) 소총 한 자루와 보급품 1㎏, 미숫가루 6봉지가 배급됐다. 소련 총을 지급한 건 북한군으로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서였다. 모신나강 소총은 1891년 개발된 장총으로 이후 개량된 것이다.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의 생존자 증언 영상.

장사리 소년들은 배가 고팠다. 미숫가루가 상륙작전 중에 다 녹아버렸다. 보급품도 애초 사흘치 분량만 지급됐다. 식량도 없었고 총알도 모자랐다. 그러나 그들은 6일이나 버텨냈다. 그 6일간 북한군과 수시로 교전이 벌어졌고, 거의 매일 폭우가 쏟아졌다. 작전명령이 보증했던 항공 보급도 없었다. 배고픔과 공포의 나날이었다. 
 
“이루 말할 수 없었죠, 고생은. 아무 지원도 없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어요.” “굶다시피 했죠. 식량이란 것은 얘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학도병 생존자들의 증언이다.
 

탈출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 갑판 위에서 내려다본 장사 해변과 전승기념공원.

9월 19일 구출 작전이 시작됐다. 오전 5시 LST 조치원호가 장사리 앞바다에 도착했다. 그러나 조치원호도 상륙에 실패했다. 육지로부터 약 30m 떨어진 지점에서 멈춰 섰다. 대원들은 해안과 배를 밧줄로 연결한 뒤 부상자부터 차례로 배에 태웠다. 북한군의 맹렬한 공격이 시작됐다. 북한군이 쏜 박격포탄이 조치원호 갑판을 때렸다. 정오쯤이면 끝날 줄 알았던 탈출 작전이 오후 3시가 넘어도 계속됐다. 오후 3시 40분 조치원호는 구출 작전을 중단하고 출발했다. 대원 39명이 아직 장사리 해안에 남아 있었다.  
 
“5분을 시간 준다고 이러더라고. 빨리 타라고. 5분 지나니 다 안 타도 그냥 떠나버렸어.” “밧줄을 끊고 출항하니까 남아있는 사람들이 아우성치고.” “아프죠. 마음이 많이 아팠죠.” 학도병 생존자들의 증언이다.  
 
명부대는 9월 20일 부산항으로 돌아왔다. 부산에서 학도병은 장사리에 상륙한 이튿날 인천상륙작전이 실시됐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다. 10월 5일 명부대 학도병은 비로소 입대명령과 군번을 받았다. 육군본부 직할 독립 제1유격대대, 즉 명부대는 10월 12일부로 유격사령부 제1유격대대로 호칭이 변경됐다.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공원의 참전용사 명단. 이름 옆의 군번은 작전이 끝난 뒤 받은 것이다. 이름이 확인되지 않아 비워놓은 글자도 있다.

한국군은 장사상륙작전이 ‘인천상륙작전과 연관된 양동작전으로써 전술적인 목표를 달성하였으며 적 후방 교란과 병참선 차단, 전투 병력 재배치를 강요하는 작전상의 성과를 거뒀다’고 평가했다. 장사상륙작전이 끝난 뒤 미 해군 극동지역 총사령관 조이 제독은 한국 해군 지휘권자 스미스 중장에게 앞으로 상륙작전은 반드시 수륙양용작전 전문가의 지휘 아래에서만 실시하도록 지시했다.
 

감췄던 역사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공원의 무덤. 해변에서 발견된 유해를 모아 무덤을 만들었다.

장사상륙작전은 한동안 잊힌 역사였다. 잊힌 역사라기보다는 감춘 역사였다. 1980년 9월 14일 살아남은 학도병이 장사리에 모여 위령제를 지내면서 덮어뒀던 진실이 하나씩 드러났다. 이전에는 아무도 장사리를 말하지 않았다. 장사 해변 송림 앞에 전몰용사 위령탑을 세운 건 1991년이고, 바닷속에 잠긴 문산호를 인양한 건 1997년이다.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에는 예산 324억원이 들어갔다. 바다 위에 문산호 모형의 기념관을 지었다. 지상 5층 기념관의 1, 2층에 상륙작전 기록과 참전용사 증언 영상이 전시돼 있다(입장료 성인 3000원). 위령탑 주위로 전승기념공원도 마련됐다. 송림 안에 작은 무덤이 하나 있다. 주변에서 수거한 유해를 모아서 만든 무덤이다. 
  

영화 '장사리 : 잊혀진 영웅들' 포스터

장사상륙작전은 2019년 9월 개봉한 영화 ‘장사리 : 잊혀진 영웅들’ 덕분에 대중에 알려졌다. 숨은 역사를 발굴해 충실히 재현했다는 평을 들었으나, 영문도 모르고 죽어간 소년들의 억울한 사연은 영화에서 잘 드러나지 않았다. 관객 수 114만 명을 기록했다.
 
장사상륙작전의 공식 전사자는 139명이고 부상자는 92명이다. 그러나 전승기념공원 전시물에도 기록이 제각각이다. 희생자가 300명이 넘는다는 기록도 있다. 행방불명자 처리도 불분명하고, 탈출 작전 당시 해안에 남겨졌던 39명의 행방도 알려진 게 없다. 
 
심지어 참전용사 명단도 부실하다. 전승기념공원 참전용사 명단을 보면 일부 글자를 비운 이름이 수두룩하다. 한 생존자는 지역방송 인터뷰에서 “전사자 가족 중 제 가족이 장사리에서 죽은 줄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라고 말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군번도 계급도 없는 소년들이 어느 날 사지(死地)에 던져진 사건이었다. 전승기념관 생존자 영상에 정수민 참전용사가 남긴 증언을 옮긴다. 
 
“시체 다 못 찾았어요. 여기 묻혀있는 사람들 현재 있습니다. 몇이나 묻혀있는지 모르겠어요.”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 생존자 증언 영상.

영덕=글·사진 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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