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 송의호의 온고지신 우리문화(91)
월천은 도산서당과 지근거리인 예안 출신이다. 그는 수시로 퇴계 선생을 찾아 가르침을 받았고 선생을 도와 역동서원을 세우는데 힘을 보탰다. 1570년 11월 퇴계가 병으로 누웠을 때는 곁에서 약 시중을 들었다. 퇴계는 다음 달 세상을 떠난다. 그는 슬픔 속에서 장례를 주선해 이듬해 2월 선생을 건지산에 안장했다. 월천은 1572년 4월 동문들과 모여 도산서당 위에 선생의 위패를 모실 상덕사를 세울 것을 논의했다. 이어 5월에는 선생의 일생과 학덕을 상세히 기술한 『퇴계선생언행총록』을 짓고 동문들과 논의해 『퇴계연보』의 초고를 만든다.
1576년에는 그가 건립을 주도한 도산서원이 완공돼 봉안제문을 지었다. 또 그는 1584년 『퇴계선생문집』편찬을 시작해 1600년 간행 임무를 완수한다. 이에 비해 제자 중 서애 류성룡과 학봉 김성일은 모두 서울에서 벼슬살이하느라 스승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또 이들은 초기 스승의 문집을 꾸미는 데도 참여하지 않았다. 월천은 이렇게 퇴계학단의 비서실장 같은 역할을 해냈다.
근거없는 비방과 모략에 시달려
월천은 남명을 만난 적은 없지만, 남명이 태어난 삼가(三嘉) 인근 고을에서 65세에 2년간 합천군수를 지냈다. 공교롭게도 정인홍의 제자였던 정온이 월천의 제자가 됐고, 그는 이후 월천의 신도비문을 짓는다. 그러나 월천이 남긴 시는 정인홍과 가까운 사이가 아님을 보여 준다. 정인홍이 근거없이 퇴계를 흠집 내자 월천은 그를 걸나라 개에 비유하며 공격한다. 그런데 어떻게 정인홍이 월천의 상덕사 종향을 도왔겠느냐는 반론이다. 월천이 종향된 것은 1614년 도산서원이 완성된 지 38년 만이었다. 이후 온갖 억측이 나왔지만 두 사람이 친했다는 근거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동문수학한 서애에 “나라 망쳤다” 공격
이와 관련해 정만조 국민대 명예교수는 “(월천의) 강화 배척론은 훗날 강화론에 참여한 류성룡과 남인 정권에 대한 여론을 부정적인 방향으로 이끄는 출발점이 됐다”고 분석한다. 조목은 도산서원에 종향되고도 이렇게 다양한 평가를 받고 있다. 사람에 대한 평가는 그만큼 어렵다.
대구한의대 교수‧중앙일보 객원기자 theore_creator@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