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기술 통합, 모던한 ‘바우하우스 양식’ 만들다

중앙일보

입력 2020.12.26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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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하우스 이야기 〈50·끝〉

1 오스카 슐레머의 ‘바우하우스 계단’(1932). 2 모홀리나기의 사진. 1928년경 베를린 방송탑에서 내려다본 풍경.

‘눈에 보이는 것’을 그 어떤 그림보다 정확히 재현하는 사진의 출현 이후, 화가들은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새롭게 증명해야 했다. 화가들은 사진으로 포착되지 않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 나섰다. 인상주의, 표현주의를 거쳐 칸딘스키의 ‘내적 필연성’에 의한 추상회화가 잇따라 나타났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표현만으로 새로운 시대를 개척할 수는 없었다. 모홀리나기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사진이 구현하지 못하는 세계를 찾아 나서기보다는 ‘사진과 함께’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고자 했던 것이다.

빛으로 그림 그린 모홀리나기
사진+그래픽으로 예술 확장

슐레머 ‘발레 3부작’ 신기술 인기
테크놀로지·예술의 편집 실험

바우하우스, 1925년 폐교 이후
‘기능주의’ 조형학교로 새 출발

베를린 시절, 말레비치나 리시츠키 등이 추구한 러시아 구축주의나 데스틸의 기하학적 조형에 몰두했던 모홀리나기는 바우하우스로 옮겨오기 직전 물감으로 캔버스에 그리기를 포기한다. 그리고 아예 ‘빛으로 그리기’를 시도한다. 이른바 ‘포토그램(Fotogramm)’이다. 포토그램은 카메라를 사용하지 않고, 감광지 위에 물체를 올려놓고 빛을 비춰 물체의 흔적을 남기는 방식이다. 사진이 발명되기 전, 다양하게 시도되었던 광학 실험 중의 하나였던 포토그램을 모홀리나기는 예술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려 시도했던 것이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에게 영감 이어져
 
바우하우스 선생으로 재직하면서부터 모홀리나기는 사진기를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한다. 모홀리나기에게 예술이란 ‘인간의 감각 경험을 풍부하게 하여, 인지 능력을 확장시키는 것’이었다. 익숙한 세상을 낯설게 볼 수 있게 한다면, 그것이 바로 예술이라는 것이다. 러시아 형식주의 미학 이론의 연장선에 있는 이 같은 모홀리나기의 예술관은 ‘카메라 앵글을 통한 시선의 확장’으로 구현됐다. 좌우로 대칭하는 두 눈을 가진 인간은 수평적 시선에 익숙하지만 수직적 시선은 낯설다. 모홀리나기는 카메라 앵글을 통해 낯선 시각적 경험을 시도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거나아래에서 올려다보는, 갑작스러운 시선의 상승과 하강을 통해 익숙한 현실을 새롭게 드러냈다.
 
기계 미학을 적극 수용하려는 그의 실험은 바우하우스 시절 포토몽타주 기법을 확장한 ‘포토플라스틱(Fotoplastik)’이라는 새로운 영역으로 확장됐다. ‘포토플라스틱’은 사진과 더불어 다양한 그래픽 작업을 편집하는 방식이다. 사진과 타이포그래피도 결합했다. 이 같은 실험은 제자 헤르베르트 바이에르(Herbert Bayer·1900~1985)의 타이포그래피에 큰 영향을 미쳤다(앞서 설명한 대로, 바이에르가 개발한 바우하우스의 산세리프체는 애플의 스티브 잡스에게 큰 영감을 줬다).
 

오스카 슐레머의 공연 ‘발레 3부작’.

‘수공예와 예술의 통합’이라는 개교 초기의 이념을 포기하고, 시대적 요구를 적극 수용한 ‘예술과 기술-새로운 통일’이라는 그로피우스의 새로운 지도 이념이 공표된 것은 1923년 8월 15일 열린 바우하우스 전시회 개막식에서였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기술’이란 ‘대량 생산을 위한 기계 기술’이다. 표현주의, 낭만주의를 폐기하겠다는 그로피우스의 선언은 이텐과의 갈등 과정에서 이미 예고되었던 것이었다. 그로피우스가 초빙한 대부분의 바우하우스 선생들은 당황했다. 자유로운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에게 ‘생산을 위한 예술’이라는 교육이념은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텐의 후임으로 부임한 모홀리나기의 과감한 기계미학적 실험들은 그로피우스의 정책 변화를 눈으로 보여줬다. 모홀리나기는 기존의 학생과 선생들 사이에서 집단 따돌림을 당할 정도였다.
 
그러나 교장 그로피우스는 바우하우스의 생산성을 증명해야만 했다. 그래야 튀링겐 주정부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이마르의 정치적, 경제적 환경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사회주의자들과 집시들이 모여 밤새 술 마시고 춤이나 추는 곳으로 여겨지는 바우하우스에 대한 인식부터 바꿔야 했다. 결국 23년 바우하우스 전시회를 계기로 일부 선생은 떠났고, 남은 선생들은 그로피우스의 새로운 교육 이념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23년의 전시회는 22년 가을 갑자기 결정됐다. 이제까지의 교육성과를 보여달라는 튀링겐 주정부의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성과를 보여주지 못한다면 폐교로 이어질 상황이었다.
 
준비 기간은 형편없이 짧았다. 구성원들은 밤을 새워가며 준비해야 했다. 전시회는 23년 8월 15일부터 9월 30일까지 진행됐다. 8월 15일부터 19일까지의 ‘바우하우스 주간’에는 그로피우스의 강연을 비롯해 칸딘스키의 ‘종합예술에 관하여’, 네덜란드의 데스틸 운동의 일원이었던 건축가 아우드의 건축에 관한 강연이 있었다. 힌데미트, 부조니,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이 연주되는 음악회도 열렸다. 스트라빈스키는 이 음악회에 직접 참석했다.
 
이때 특별히 주목 받은 공연이 오스카 슐레머(Oskar Schlemmer· 1888~1943)의 ‘발레 3부작’이다. ‘발레 3부작’은 바우하우스 주간에 처음 공연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슐레머가 12년 슈투트가르트의 아돌프 횔첼 밑에서 이텐과 함께 공부할 당시 이미 창안했던 것이다.
 

게오르그 무헤가 설계한 ‘암 호른의 실험주택’. [사진 윤광준]

20년 바우하우스에 초빙된 슐레머는 ‘무대 공방’을 맡았다. 언뜻 보면 바우하우스와 무대 공방은 사뭇 어색한 조합이다. 그러나 그로피우스는 ‘무대’를 무한한 공간적 경험을 유한한 공간에 빛과 소리와 움직임을 통해 구현하는 창조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무대’는 건축과 상당 부분 일치한다고 여겼다. 바로 이 같은 그로피우스의 선진적 생각이 ‘종합예술’을 주장하는 칸딘스키, 슐레머를 바우하우스에 오게 했던 것이다.
 
슐레머는 그로피우스의 의도를 충실하게 실현했다. 그의 ‘발레 3부작’은 로봇과 같은 기계적인 인공 인물을 등장시켜 인간의 움직임과는 다른 기계화 된 동작을 선보였다. 추상화·기계화·자동화라는 미래의 테크놀로지가 예술과 어떤 식으로 편집될 수 있는가를 누구보다도 앞서 실험한 것이다. ‘발레 3부작’과 더불어 오스카 슐레머는 바우하우스 전시회에서 바우하우스 건물 입구에 색유리와 파이프 등을 이용해 벽화와 부조 장식도 맡아 선보였다. 그가 바우하우스 폐교에 저항하며 32년 그린 ‘바우하우스 계단’은 후에 데사우 바우하우스의 상징이 된다.
 
학교 건물에서 멀지 않은 ‘암 호른’이란 곳에 게오르그 무헤(Georg Muche·1895~1987)가 설계한 실험 주택이 전시회를 앞두고 불과 4개월 만에 건설됐다(이텐의 조수를 거쳐 직물 공방을 맡고 있던 무헤는 그로피우스의 지도 이념에 불만이 많았다. 후에 그는 이텐이 설립한 베를린 조형학교로 옮겨갔다). 당시까지 ‘건축의 날개 아래 모든 예술의 통합’이라는 바우하우스의 창립 이념을 제대로 구현한 건축물은 없었다. 무헤는 ‘한 가족이 사는 표준주택’으로 큰 거실을 중심으로 침실·식당·화장실·게스트룸 등이 기능적으로 통합되도록 배치했다. 그동안 막연하게 이야기되던 평평한 지붕의 ‘주거 기계’가 실제로 구현된 것이다.
 
학교 건물 안팎에 설치된 전시장에는 각 공방의 실습 작품이 등장했다. 직물·도자기·스테인드 글라스·장난감·가구 등에 구현된 바우하우스 특유의 기하학적 문양은 방문자들의 주목을 끌었다. 이른바 ‘바우하우스 양식(Bauhausstil)’의 출현이다. ‘바우하우스 양식’이란 직선·네모·입방체·평평한 지붕·유리와 강철관·산세리프 서체·소문자 혹은 대문자만의 텍스트 등으로 구성된, ‘새롭고 모던한 것’들의 총칭이었다.
 
바이마르 시절이 진정한 ‘창조학교’
 
전시회는 성공적이었다. 바우하우스 주간에만 수천 명이 독일 중부의 작은 도시 바이마르를 찾았다. 전시 기간의 총 관람자는 1만 5000명에 이르렀다. 독일 뿐 아니라 유럽 대부분의 언론에서 바우하우스 이야기가 긍정적 혹은 비판적으로 다뤄졌다. 공연과 전시, 그리고 강연을 통해 바우하우스 학생과 선생들이 함께 제공한 다양한 콘텐츠는 ‘새롭고 모던한 것’에 굶주린 관객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이 전시회를 통해 바우하우스는 설립 초기 ‘다양한 지식의 편집실험’을 끝낸다. 그리고 기능주의·실용주의라는 시대 정신에 어울리는 새로운 단계로 이행한다.
 
24년 봄, 튀링겐 연방의회 선거에서 우파 정당이 정권을 잡는다. 보수적 정치가들과 바우하우스에 반감을 갖고 있던 바이마르 수공업자들은 서로 손을 잡고 바우하우스를 탄압했다. 회계 감사, 선생들과의 계약 해지 등 다양한 방식의 압력에 바우하우스는 결국 25년 폐교를 선언하고, 데사우로 옮겨갔다. 그리고 ‘기능주의’에 충실한 조형학교로 새롭게 출발한다.
 
바우하우스는 바이마르(1919~1925)에서는 ‘국립학교’, 데사우(1925~1932)에서는 ‘시립학교’, 그리고 마지막 베를린(1932~1933)에서는 ‘사립학교’로 운영됐다. 이 가운데 불과 6년간 존립했던 ‘바이마르 바우하우스’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창조학교’였다. 유럽의 모든 아방가르드 지식이 이 작은 학교에 몰려들어 집중적으로 ‘편집’되었기 때문이다. 지식은 편집된다. 편집은 곧 창조다.
 
김정운 문화심리학자
베를린 자유대에서 문화심리학으로 디플롬,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베를린 자유대 전임강사, 명지대 교수를 역임했다. 2012년 교수를 사임하고 일본 교토 사가예술대에서 일본화를 전공했다. 2016년 귀국 후 여수에 살며 그림 그리고, 글 쓰고, 작은 배를 타고나가 눈먼 고기도 잡는다. 저서로 『에디톨로지』『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남자의 물건』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