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회 중앙시조대상] 단정하게 비운 ‘맑은 가난’ 그려내고 싶었죠

중앙일보

입력 2020.12.07 00:03

수정 2020.12.07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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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조대상 - 서숙희

국내 최고 권위의 시조문학상인 제39회 중앙시조대상 수상작으로 서숙희(61) 시인의 ‘빈’이 선정됐다. 중앙시조신인상엔 류미야(50) 시인의 ‘물구나무서기’가 뽑혔다. 등단 무대인 제31회 중앙신춘시조상은 김나경(26)씨의 ‘구멍’이 차지했다.

 
중앙시조대상은 시집을 한 권 이상 펴냈고 등단 15년 이상인 시조 시인, 중앙시조신인상은 시조를 10편 이상 발표한 등단 5년 이상 10년 미만의 시조 시인이 수상자격을 갖는다. 중앙신춘시조상은 올해 1월부터 11월까지 매달 실시한 중앙시조백일장 입상자들로부터 새 작품을 받아, 그중 최고 작품을 기리는 연말 장원 성격이다.

등단 29년 만에 중앙시조대상
엄마 향한 유년의 그리움이
문학·생을 향한 갈망으로 승화

중앙시조대상과 신인상 예심은 시조 시인 김남규, 이숙경씨가, 본심은 시조시인 이정환, 백이운, 이달균씨가 맡았다. 중앙신춘시조상은 이종문, 최영효, 김삼환, 강현덕 시인이 심사했다. 시상식은 11일 오후 4시 서울 프레스센터(서울 중구 세종대로124) 19층에서 열릴 예정이다.
 
빈, 하고 네 이름을 부르는 저녁이면
하루는 무인도처럼 고요히 저물고
 
내 입엔 셀로판지 같은
적막이 물리지


어느 낮은 처마 아래 묻어 둔 밤의 울음
그 울음 푸른 잎을 내미는 아침이면
 
빈, 너는 갓 씻은 햇살로
반듯하게 내게 오지
 
심심한 창은 종일 구름을 당겼다 밀고
더 심심한 나는 구름의 뿔을 잡았다 놓고
 
비워둔 내 시의 행간에
번지듯 빈, 너는 오지

서숙희 시인은 “시조를 쓰는 건 즐거움이자 고통이다. 고통이 따르지 않는 즐거움은 진짜 즐거움이 아니다” 라고 말했다. 포항=송봉근 기자

“고통과 희열은 양자택일의 대상이 아니다. 고통이 곧 희열이고, 희열이 곧 고통이다.” 지난달 25일 서숙희 시인은 “창작이 고통스럽지 않은가?”라는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그렇게 고통과 희열을 넘나들며 시조 창작에 매진한 그는 등단 29년 만에 중앙시조대상 수상자가 됐다. 서 시인은 “중앙시조대상은 제게는 넘어야 할 큰 산이자, 돌아야 할 큰 굽이였다”고 말했다.
 
서 시인의 고향은 경북 포항시 기계면이다. 초등학교·중학교를 거기서 다녔다. 문학소녀였던 그는 백일장만 있으면 나가서 산문을 썼다. 그 뒤에는 편지로 단련된 서 시인의 유년이 있었다.
 
“초등학교 내내 어머니와 떨어져서 지냈다. 언니, 오빠는 돈 벌러 도시로 가고, 저는 아버지와 둘이서 시골에서 오래 살았다. 지금처럼 교통이 좋은 것도 아니고, 전화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방학 때만 엄마를 볼 수 있었다. 그러니 그리움이 얼마나 컸겠나. 방학 때가 아닌데 엄마를 만나는 길은 편지뿐이었다. 그래서 편지를 쓰고 또 썼다. 그래서 제 문학의 근원은 ‘갈망’이다.”
 
‘갈망’이란 두 글자를 뒤집으면 ‘결핍’이 된다. 유년의 결핍이 자라고 자라서 서 시인에게는 문학과 생에 대한 커다란 갈망이 됐다. 서 시인은 1992년 매일신문과 부산일보에서 시조로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2관왕이었다. “시조는 자유시와 다르다. 오히려 말을 빼고 덜어내는 작업을 해야 한다. 함축과 긴장이라는 운문의 진짜 매력이 있다.”
 
뜻밖의 대답이었다. ‘3·4·3·4 혹은 3·5·4·3’ 하는 시조의 형식이 시인을 가두는 제약이나 틀이 아니라고 했다. 오히려 완성으로 안내하는 일종의 나침반이라고 했다. 서 시인은 시조를 쓰면서 ‘모국어 가락’을 절감한다고 했다. “우리의 모국어는 시조에 가깝다. 우리 단어는 거의 2음절 아니면 3음절이다. ‘자나깨나 불조심, 너도나도 불조심’. 이런 표어도 16자가 안 넘어가야 눈에 쫙 달라붙는다.”
 
서 시인은 40년간 포항시청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지난해 정년퇴직했다. “은퇴하고 나니 직장 다닐 때의 번잡하고 바쁜 일상이 싹 비워졌다. 단정하게 비워진 여백 같은 시간과 공간이 내게 주어졌다.” 그런 상황에서 중앙시조대상 수상작 ‘빈’을 썼다고 했다.
 
“저는 이 시가 ‘맑은 가난’으로 받아들여졌으면 좋겠다.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고요한 내면이 있다. 그런 것들을 이미지화하고 싶었다. 그래서 코로나로 어수선한 이 시기에 차분하고 따스한 위안을 주고 싶었다.”  
 
◆서숙희
1959년 경북 포항 출생. 92년 매일신문,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 96년 월간문학 신인상 소설 당선. 백수문학상, 김상옥시조문학상 등 수상. 시조집  『먼 길을 돌아왔네』 『아득한 중심』 , 시조선집  『물의 이빨』  등.

 
백성호·김호정 기자 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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