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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회 중앙시조대상] 단추 달다 끄적인 메모의 깜짝선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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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중앙신춘시조상 - 김나경

구멍

기둥이 풀려있는 단추를 그러안은

헐렁한 하품이다
배고픈 결속이다

열리고 닫히는 것이
지금 잠시 흔들린다

생명이 없는 것은 그 어둠을 알 수 없지

맨 처음 잠겼으니
맨 나중 풀린다는

입술이 어처구니없게
헛소리를 물고 있다

소통이나 화해 같은 말랑하고 둥근 약속

나가려는 너를 잡고
매달리다 떨어져도

한 가닥 실오라기는
변치 않을 흔적이다

조심조심 건너온 2020년 한 해가 저무는 12월, 당선 소식은 구름으로 자욱한 하늘을 번쩍 들어 올렸습니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이 무게가 기쁨일까요. 한순간 먹먹했습니다.

고등학교 때 문예반장을 하면서도 대학진학은 문창과가 아닌 군사학과를 지망한 것은 집안의 큰 그릇이 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해군으로 근무하면서도 마음속 새 한 마리는 정박한 배 안에 있지 아니하고 늘 먼 하늘을 우러러 날고 있었답니다.

군대라는 조직생활에서 혼자 단추를 달다가 메모했던 것이 이렇게 큰 영광을 주다니 무슨 말을 어찌해야 도리를 다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헐렁한 하품처럼, 실기둥이 풀어진 단추를 그러안고 있는 그 구멍의 결속, 열리고 닫히는 것들의 소통과 잠기고 풀리는 것의 화해를 잠시 생각했습니다.

스물 중반을 넘기면서부터 세 번을 생각하고 한 번 말하자고 다짐했습니다. 말수를 줄이는 대신 먼 곳을 보면서 눈을 맑히고자 했습니다.

당신 문학의 뜻은 접고 우리 자매를 위해 묵묵히 걸어오신 엄마와 재주 많은 여동생의 조언, ‘중앙일보 시조백일장’이 제겐 스승입니다. 철없는 제 시조를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 발자취를 따라가며 시조단의 쓸모 있는 주춧돌이 되겠습니다. ‘세월호’ 참사로 꿈을 다 펼치지 못하고 떠난 단원고등학교 후배들 생각에, 변치 않을 한 가닥 실오라기 흔적을 남깁니다. 

◆김나경

김나경

김나경

1994년 서울 출생. 해군부사관 복무 후 간호대학에서 간호학을 전공하고 있다. 2019년 ‘항해일기’로 장원.

개성있는 리듬으로 엮은 위로 메시지 

중앙신춘시조상 심사평 

또 한 명의 시인이 탄생했다. 그 주인공은 ‘구멍’을 보내온 김나경씨다.

끝까지 뿔을 겨룬 작품은 정두섭씨의 ‘대동어지도’였다. ‘대동어지도’는 각 지역 언어를 이용한 4편의 소품들인데, 방언의 구사도 능수능란하였지만 무엇보다 단수를 빚어내는 솜씨가 탁월했다. 그러나 그중 한 편이 본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기시감의 부담을 안겨주어 아쉬움을 남겼다.

김나경씨의 ‘구멍’은 독특한 감각과 참신한 상상력을 보여주었다. 막 떨어져 나가려는 단추로 자칫 관념에 머물 수도 있었던 ‘구멍’에 구체성을 불어넣었다. 어두운 시대에 보내는 위로의 메시지를 개성적인 리듬으로 잘 직조하였다. 하지만 다소 난해하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되어 고민은 깊어졌고 토론 또한 더 격렬해졌다. 그러나 신인을 뽑는 장이니만큼 현재의 작품성과 미래의 가능성을 아울러 평가해야 하기에, 격론 끝에 신인다운 패기로 새로운 보법을 보여준 김나경씨의 손을 들어주기로 하였다. 권선애, 김미영, 정상미씨도 본선에서 논의하였음을 밝히며 당선자에게는 축하를, 아쉽게 고배를 마신 분들께는 격려를 보낸다.

◆심사위원=이종문·최영효·김삼환·강현덕(대표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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