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으로 간 고조선 문명 〈1〉
고조선 문명의 후예인 훈족(Huns, 중국 호칭 흉노족)이 4세기 후반에 유럽에 들어가서 거대한 ‘훈 제국’을 세우고, 유럽 민족 대이동을 일으키며 결국 거대한 서로마 제국을 붕괴시켰다면 아마 대부분 놀라고 믿지 않을 것이다.
고조선 서쪽 살던 기마족 ‘산융’
BC 108년 이후 중앙아 거쳐 유럽에
역공 기마전술로 서로마도 삼켜
우랄~알프스산맥 대제국 일궈
쫓겨난 서고트족, 이베리아 반도로
게르만·색슨족 등 연쇄 이동 일으켜
고조선 문명, 세계 첫 5대 문명 중 하나
고중국(하·상·주)의 주(周)가 고조선과 친했던 상(商)을 멸망시킨 후인 BC 771년 훈이 주(周)를 공격하여 수도 호경(鎬京)을 점령했다. 주나라는 훈에 패배하여 동쪽으로 천도하는데, 이후부터 동주(東周) 시대가 시작되고 조정은 약화되어 군웅이 할거하였다. BC 664년에 고중국동주의 제(齊) 황공(桓公)이 조(曺)·허(許)·노(魯)·연(燕)·진(晋) 등과 고중국 연합군을 편성하여 고조선을 공격해서 조·주 전쟁이 일어났다. 산융(훈)·고죽·불령지·불도하가 고조선 연합군을 편성하여 고중국 연합군을 격퇴하였다. ‘훈’이 이 전쟁 때 고조선 연합군의 주력이었는데 훈이 고조선 후국이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이다.
후조선 멸망 후 두만의 아들 모돈(冒頓, 모돌)은 BC 3세기에 훈족의 독립을 선언하고 ‘탱그리고도단우(撑犁孤塗單于)’라는 호칭의 황제에 올랐다. 훈족 황제 호칭을 ‘單于’라 쓰고 중국과 한국에서는 ‘선우’라고 읽는데, 원래는 ‘단우’라는 고조선·훈어이다. ‘단=檀=單’이고 ‘하늘’의 뜻이며, ‘우’는 ‘왕·황제’의 뜻이다. ‘단우’는 ‘천왕(天王)’ ‘천제(天帝)’의 뜻이다. 모돈은 자기가 단군조선의 계승자임을 주창한 것이었다.
고조선, 훈 족장에게 ‘두만’ 직책 줘
고조선 연방 제국의서변에서 고조선을 지키는 역할을 해오던 막강한 유목 기마 민족 ‘산융’은 위만조선 멸망(BC 108) 후 한나라 무제(武帝)가 이끄는 새 기병 부대의 총공격을 받고 패배하여 몽골고원으로 후퇴하였다.
남흉노도 ‘한’(漢)족 장군들이 AD 349년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잡고 흉노족을 대대적으로 살해하기 시작했으므로 서방 이동을 감행하게 되었다.
흉노족은 서방으로 이동하여 카스피해 북쪽 볼가강과카마강이 합류하는 지역의 초원지대에서 상당 기간 정착해 유목생활을 하면서 힘을 배양했다. 흉노족은 한발이 장기화되어 목초지가 메마르게 되자 AD 375년경 볼가강을 건너서 동유럽 판노니아 평원에 살고 있던 게르만족인 동(東)고트(Goths)족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고 신민으로 삼았다.
훈(흉노)족의 동아시아식 경기병(輕騎兵) 부대, 강력한 활, 질풍노도 같은 기동성,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기습·돌격, 위장 후퇴로 적의 튼튼한 대오를 분산시킨 후 전격적 급반전 역공의 기마전술 등을 유럽민족들은 감당하지 못하고 연속 패하였다. 훈족은 카르파티아 분지(판노니아 평원)를 정복하여 이곳을 자기의 정착지로 삼고 ‘훈족의 땅’(The Land of Huns, Hungary)이라고 칭하였다. ‘가리(gary)’는 흉노어로 ‘땅’의 뜻이었다. ‘가리’는 현대 몽골어에서도 ‘땅’의 뜻이다. 훈족은 이어서 서고트족을 공격하여 내쫓았다. 정착지를 빼앗긴 서고트족은 AD 378년 로마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서로마 영토로 이주해서 자치권을 획득했다가, 410년에 4일간 로마를 약탈하고 이베리아 반도로 이동 정착하였다. 프랑크족은 갈리아(지금의 프랑스) 지방의 북부에, 부르군드족은 갈리아 지방의 남부에 이동 정착하였다. 랑고바르드족은 이탈리아 북부로 남하 이동하였다. 라인강 유역에 거주하던 반달(Vandal)족은 이베리아 반도를 통과하여 지금의 아프리카 튀니시아 지방에 정착해서, 455년 로마시를 습격 약탈하기도 하였다.
아틸라 외모, 영락없는 동아시아인
훈(Hun, 흉노)족은 그사이에 중부 유럽에 ‘훈 제국’을 세웠는데, 아틸라(Attila)칸 때에는 그 영역이 동쪽은 우랄산맥과 카스피해, 서쪽은 알프스산맥, 북쪽은 발트해, 남쪽으로 다뉴브강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아틸라의 외모에 대해서는 그를 몇 미터 앞에서 본 동로마 역사가 프리스쿠스(Priscus)의 기록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프리스쿠스는 “그는 키가 작고 어깨가 넓었으며, 머리는 매우 컸고, 눈은 작았다. 수염이 성기게 나 있고, 머리털은 흰 머리가 섞여 있었다. 코는 납작하였고, 피부색은 엷은 갈색이었다. 출신 족에 의한 특징이 현저하였다”고 하였다. 즉 아틸라의 외모는, 서양 초상 그림과는 전혀 달리 전형적인 동아시아인이었다.
아틸라와 그의 정치를 분석적으로 연구한 엣셰(Katalin Escher)와 레베딘스키(Lebedensky)에 의하면, 아틸라는 언제나 검소하고, 솔직했으며, 매우 겸손하고 관대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황금을 전혀 탐하지 않았으며, 거두어들인 황금을 모두 통치자금에 쓰거나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고조선 연방을 서변에서 지키던 소수의 훈(산융)족이 ‘말’을 동력으로 하여 유럽에 들어가서 AD 4~5세기 서·북·동유럽을 포괄하면서 동·서 로마제국에 맞서는 거대한 ‘훈 제국’(Hun‘s Empire)을 건설한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훈’과 ‘흉노’
‘훈’족은 동아시아에 있을 때도 자기를 ‘훈’(Hun)족이라고 했다. ‘사람’‘따뜻한 사람’의 뜻이라고 한다. 몽골어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고중국에서 다른 민족에게 나쁜 뜻 한자를 붙여 작명하는 악습으로 ‘훈’을 비하하여 ‘흉노’(匈奴)라고 주로 칭했는데, ‘흉측한 노예’라는 뜻이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뒤에 ‘흉노’(匈奴)라는 호칭을 썼지만 훈육(葷粥)과 훈육(薰育)으로도 나온다. 『맹자』에는 훈죽(獯鬻)으로 나온다. 여기서 훈(Hun)을 葷, 薰, 獯 등 여러 글자로 표기한 것은 흉노족이 자기를 훈(Hun)으로 호칭한 것을 동일 음차(音借) 표기한 것이고, 粥, 育, 鬻 등은 비하하는 의미를 붙인 꼬리표기이다. 비칭 꼬리표기를 떼어버리면 흉노족이 곧 훈(Hun)족임을 알 수 있게 된다.
서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서울대 교수(1965~2003) 정년퇴임. 한양대·이화여대·울산대 석좌교수(2003~2018) 역임. 저서 『독립협회 연구』 『한국독립운동사 연구』 『3·1운동과 독립운동의 사회사』 『한국 민족의 기원과 형성』 『고조선 문명의 사회사』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