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열일곱 살 때부터 늘 스타가 되기를 꿈꿨다. 찰리 파커, 지미 핸드릭스 같은 우상들을 떠올리며 이들이 스타가 된 과정을 꿈꿨다.”
롯데뮤지엄 바스키아 회고전
회화·조각·드로잉 등 150점
‘거리’‘영웅’‘예술’로 조명
“30년 흘러도 신선하고 세련”
지난 2017년 5월 미국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바스키아의 1982년 작 회화 ‘무제(Untitled)’가 1억1050만 달러(당시 약 1248억원)에 낙찰됐다. 미술품 경매 최고가인 파블로 피카소의 ‘알제의 여인들’의 기록 1억794만 달러(2025억원)를 넘어서진 못했지만, 1980년대 이후 작품 중 1억 달러를 넘은 첫 작품이자, 미국 작가 작품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
바스키아는 1960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아이티공화국 출신, 어머니는 푸에르토리코계 미국인이다. 그의 어머니가 어린 아들을 데리고 뉴욕의 주요 미술관을 다닌 덕에 바스키아는 다빈치부터 피카소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걸작 그림을 가까이서 접하며 자랐다.
예술가 바스키아에게 그의 어머니가 끼친 영향은 미술관 관람에 그치지 않는다. 1968년 만 7세 때 큰 교통사고로 병원에 장기간 입원했을 때 어머니는 해부학 입문서 『그레이의 해부학 (Gray’s Anatomy)』를 선물했다. 전문가들은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해부학적인 인체 모습과 내장 기관들, 강조된 팔과 다리의 형태는 이때의 경험과 연관됐다고 본다. 이후에도 바스키아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해부학 드로잉을 봤고 인체에 대한 탐구는 삶과 죽음에 대한 사유와 연결되면서 뼈와 해골, 신체 기관이 그대로 노출되는 독창적인 이미지로 나타난다.
그러나 ‘익명’으로 남고자 했던 알 디아즈와 ‘스타’가 꿈이었던 바스키아는 세이모 활동에 대한 이견으로 결별했다. 이후 우편엽서와 티셔츠에 그림을 그려 생계를 유지하던 바스키아는 1982년 미국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언더그라운드 낙서미술가에서 신인 아티스트로 급부상했다. 1985년 앤디 워홀과도 협업 전시를 열었고, 이후 1988년 코트디부아르 이주를 준비하던 중 8월 12일 약물 과다로 세상을 떠났다.
어린아이가 거칠게 낙서한 듯이 자유분방한 화법이 도드라지는 바스키아의 작품들은 제작된 지 30여 년의 시간이 무색하게 여전히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텍스트와 드로잉을 조합하며 스프레이, 오일, 파스텔, 크레용, 유화와 아크릴 물감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고,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는 방식으로 화면에 즉흥성과 리듬감을 더했다.
1981년 작 ‘뉴욕 뉴욕’도 그중 하나다. 뉴욕의 번잡한 거리를 묘사한 이 작품엔 왕관 형태와 얼굴, 암호 같은 글자가 캔버스를 가득 채운다. 당시 비평가들은 “유치하고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했지만, 지금 평단에선 “시적인 상상력을 자극하는” 작품으로 추앙받는다.
이번 전시 작품은 대부분 뉴욕 사업가이자 컬렉터인 호세 무그라비의 소장품이다. 작품가만 1조원에 달한다. 전시를 기획한 구혜진 롯데뮤지엄 큐레이터는 “바스키아는 대중문화의 다양한 이미지를 즉흥적이면서도 감각적으로 조합했다”며 “함축적 은유와 상징으로 점철된 이미지와 탁월한 색채 감각은 지금 보아도 탄성을 자아낼 만큼 세련됐다”고 말했다. 전시는 내년 2월 7일까지.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jule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