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Big Questions] 게임의 미래
5000년 전 고대 수메르인들도 보드게임
국회의원·과학자·요리사 등 역할
누구나 주인공이 돼 대리만족
온라인 게임은 이미 세계서 돌풍
놀이는 본능,석기시대 때도 존재
간접 경험 통해 위험 미리 대비
자신만을 위한 다양한 삶 가능
우리의 관심과 시간을 언제나 독차지하려는 게임과 놀이. 현대인만이 아니다. 5000년 전 고대 수메르인들은 옹기종기 모여 ‘우르의 보드게임’을 즐겼고 석기시대 원시인들 역시 그들만의 놀이와 게임에 푹 빠져 있었을 것이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진정한 블루오션이자 미래 새로운 먹거리라고 우리야 호들갑 떨지만, 사실 놀이와 게임은 오랜 시간 동안 직접적인 생존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제 궁금해진다. 한 번이라도 더 사냥을 나갈 수 있었을 시간에 인간은 왜 게임과 놀이를 즐겼던 걸까? 인류는 왜 “쓸모없는” 놀이에 시간을 낭비하는 걸까?
네덜란드 역사학자 요한 하위징아는 인류의 문명 그 자체가 자유롭고, 시간에 얽매이지 않는 놀이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하지만 아무리 인류가 ‘생각’에만 집착하는 ‘호모 사피엔스’가 아닌, 즐거움과 놀이를 더 선호하는 ‘호모 루덴스’라고 가설하더라도, 여전히 질문의 핵심은 남아있다. 인간은 왜 노는 걸까? 러시아 발달심리학자 레프 비고츠키는 주어진 여유 시간과는 상관없이 이 세상 대부분 아이는 어른보다 더 많은 시간을 놀이에 투자한다고 가설했다. 특히 경험과 교육 없이도 아이는 스스로 놀이를 선택한다. 그렇다면 놀이는 인간의 타고난 본능 중 하나이지 않을까?
다른 포유류들의 뇌와 비슷하게 인간의 뇌 역시 ‘결정적 시기(critical period)’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완성되지 않은 상태로 태어난 뇌는 결정적 시기 동안의 경험을 통해 완성된다. 여기서 자주 사용된 뉴런 간의 연결고리는 강화되지만, 사용되지 않는 신경세포 간의 연결성은 사라지거나 약해진다. 어린 시절 뇌는 마치 젖은 찰흙 같은 유연성을 가지고 있기에 경험을 통해 노출된 환경에 최적화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새로운 문제가 하나 생긴다. 결정적 시기에 모든 걸 경험해보기에는 세상이 너무나 다양하고 위험하다. 하지만 만약 직접 경험할 수 없는 상황과 경우를 놀이를 통해 간접적으로 미리 경험한다면? “내가 만약 공주를 구해야 하는 왕자라면?”, “내가 만약 남극을 탐험한다면?” 마치 파일럿이 비행 시뮬레이션을 통해 실제 상황에 대비하듯, 인간은 놀이라는 ‘롤플레잉’, 그러니까 ‘역할 수행’ 게임을 통해 자신의 인생이라는 ‘극한 게임’을 준비한다는 것이다.
놀이 통해 자기 인생이라는 ‘극한 게임’ 준비
모두가 같은 게임을 해야 하기에 승자보다 언제나 패자가 더 많을 수밖에 없는 인생. 그런데 최근 흥미로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온라인 세상에선 언제나 내가 주인공인 새로운 형태의 롤플레잉 게임이 가능해졌으니 말이다. 국내 기업들이 개발한 MMORPG 게임들이 세계적으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오늘날. 어쩌면 그들은 인류의 가장 오래된 놀이를 반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바로 ‘인생 시뮬레이션’이다. 하지만 이제 모두가 같은 세계에서 경쟁할 필요는 없다. 나를 위한, 언제나 내가 중심이자 주인공인 세상. 현실에선 다음 달 월급을 눈 빠지게 기다리는 신입사원이지만, 나만의 세상에서는 영웅이자 신이 될 수 있다. 더구나 앞으로 더 발전할 인공지능 기술을 통해 지금까지 내 세계관 안에서만 존재하던 NPC(Non-Player Character, 인간이 아닌 비플레이어 캐릭터)들이 우리가 사는 세상으로 문자와 e메일을 보내고, 유튜브 영상과 생일선물을 추천하는, 현실과 게임의 세상이 서로 연속되는 하이브리드 인생 시뮬레이션을 상상해볼 수도 있다.
놀이와 게임이 인류 문명을 가능하게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 고도로 발달한 문명은 더는 모두가 공생하는 ‘공공 세상’이 아닌, 한 명의 소비자를 위한 ‘개인 세상’을 가능하게 한다. 대량 생산이 아닌 개인화한 소비, 매스 미디어가 아닌 개인 미디어, 그리고 하나의 세상 시뮬레이션이 아닌 각자가 개인의 우주를 은신처로 삼는 세상에서 우리는 앞으로 살게 될지도 모른다. 현실은 잔인하고 나에게 무심하지만, 미래 인류는 어쩌면 자신만을 위한 ‘세상 시뮬레이션’을 통해 위로와 위안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독일 막스-플랑크 뇌과학연구소에서 박사학위를 땄다. 미국 MIT와 일본 이화학연구소에서 각각 박사후 과정과 연구원을 거쳤다. 미국 미네소타대 조교수, 보스턴대 부교수를 지냈다. 2013~2015년 중앙SUNDAY에 ‘김대식의 Big Questions’를 연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