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안, 리스크, 대응
한일비전포럼 지음
늘품플러스
그리스어 ‘아포리아(aporia)’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라는 뜻이다. 앞뒤가 꽉 막혀 나아가지도, 돌아가지도 못하는 막다른 골목이다. 지금 한·일 양국 외교관계가 바로 이런 경우다. 그 갈등의 방아쇠는 2018년 10월 30일 한국 대법원이 신일철주금(현 일본제철)에 대해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1억원씩 배상하라는 판결이었다. 파장은 메가톤급이었다. 소송 당사자가 많고 잠재적인 배상 대상자가 수십만명에 이르기 때문이다.
외교·교류 실종 민간이 풀자
집단지성 46명 17차례 포럼
분야 가리지 않고 난상토론
청소년 교류 등 실천안 마련
그야말로 양국 관계가 아포리아에 빠졌지만, 양국 정부는 한 치도 물러설 조짐이 없다. 양국이 서로 정상회담을 기피하고, 외교라인의 실무 대화도 줄어들었다. 한일비전포럼은 이런 배경에서 지난해 초 출범했다. 민간 차원에서라도 한·일 대화의 물꼬를 터야 한다는 취지였다. 『갈등에 휩싸인 한일관계 - 현안, 리스크, 대응』은 지난해 초부터 최근까지 17차례에 걸쳐 개최된 이 포럼의 논의 내용을 담았다.
참여자들은 한·일 갈등 해소에 필요한 지혜라면 분야를 가리지 않았다.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부터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일본발 경제 쇼크 가능성, 양국 정부·기업·국민이 배상에 함께 참여하는 방안(일명 문희상안)까지 망라됐다. 논의 내용과 전문가 제안은 즉각 중앙일보 지면에 소개돼 큰 반향을 일으켰다. 주한 일본 대사관에서도 주요 내용을 본국 외무성에 보고했다. 무엇보다 포럼에는 외교부 장관(유명환)·대사(최상용, 위성락, 안호영)를 지낸 외교관과 한·일 관계를 연구하는 학자(김광두 서강대, 박철희·김현철 서울대, 정재정 서울시립대, 양기호 성공회대, 이원덕 국민대)에 그치지 않고 국회의원(김진표, 강창일, 김세연)과 기업인(구자열 LS그룹회장, 김윤 한일경제협회장)도 참여해 논의의 수준을 높였다. 신현호 대한변협 인권위원장도 힘을 보탰다.
포럼은 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참여자들은 코로나19 사태와 함께 미·중 패권경쟁이 격화하는 세계적 대전환기에 한·일 양국의 지정학적 협력을 배제할 수 없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홍 이사장은 책 서문에 “포럼은 앞으로도 청소년 교류 등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를 위해 노력할 것”이라며 “한일국교 정상화 60년이 되는 2025년을 목표로 양국이 역사 화해 프로세스에 돌입할 것을 제안한다”고 썼다. “양국 갈등을 대물림하지 말자”고 했던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의 생각과도 일맥상통한다.
한·일 양국은 시시포스의 형벌처럼 대립과 화해를 반복해왔지만, 이렇게 극명한 아포리아에 빠진 적은 없었다. 아포리아는 하나의 명제에 대해 증거와 반증이 동시에 존재하므로 그 진실성의 입증은 쉽지 않다. 그러나 무엇이 문제인지 또렷해지는 만큼 아포리아의 발견은 문제 해결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이 책은 치열했던 그 과정을 생생히 담았다. 집단지성으로 빚어낸 한일비전포럼의 기록이 빛나는 이유다.
김동호 논설위원 dongho@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