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 인사이드] 54년 된 군골프장의 운명
굵은 빗줄기가 쏟아진 23일 오후 서울 노원구 화랑로의 태릉 골프장 클럽하우스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남자 라커룸 앞에 걸린 을지문덕 장군 그림이 홀을 노려볼 뿐이었다. 클럽하우스 2층에는 ‘잘 쉬다 갑니다’라는 노무현 대통령의 방명록과 박정희 대통령의 개장 기념 시타 사진(1966. 11. 5)이 나란히 전시돼 있다. 마치 한국 현대사의 정수를 이 골프장에서 볼 수 있는 듯했다.
국내 세 번째 오래된 골프 유적
페어웨이 주위엔 적송들 장관
71년 박정희-미 부통령 회동도
“서울 북쪽 공기 통하는 숨구멍”
골퍼들 대부분 아파트 건설 반대
유럽 골프 성지처럼 남겨뒀으면…
노무현 ‘잘 쉬다 갑니다’ 방명록도
54년이나 된 오래된 골프장이지만 코스는 말끔했다. 특히 페어웨이 주위를 감싸고 있는 적송들이 멋졌다. 마스터스가 열리는 오거스타 내셔널의 소나무보다 오히려 나아 보였다. 골프장에서 만난 한 캐디는 “골프장이 들어서기 전부터 이곳이 노송 보호 지역이었다고 들었다. 160년도 더 된 적송들도 있는데 이곳을 아파트 숲으로 만든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나무를 보존하기 위해 차라리 공원으로 만든다면 좋겠다”고 말했다.
태릉 골프장은 한국 골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초창기 프로골퍼들은 캐디를 하면서 골프를 접했다. 태릉 골프장에서도 유명 선수 몇몇이 나왔다. 태릉 골프장은 1970년대 중반까지 아시안 투어의 한국오픈과 KPGA 선수권을 여러 차례 개최했다.
태릉 골프장은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현장이기도 하다. 1971년 파월 한국군 부대의 철수를 놓고 박정희 대통령과 스피로 애그뉴 미국 부통령이 회동한 곳이 바로 태릉이다. 군인 이외에도 정치인, 고위 관료 등도 이곳을 많이 찾았다.
오래된 골프장이라 이야깃거리도 많이 쌓였다. 장성들은 장군 진급을 앞둔 영관급 장교들을 격려 차원에서 데려오곤 했다. 15번 홀이 시험대다. 이른바 ‘장군봉’이라 불리는 언덕을 넘겨야 한다. 평지 기준으로 200m 정도 공을 날려 보내면 언덕을 넘길 수 있는데 부담감 탓에 실수하는 경우가 많다. 이를 넘기지 못하면 “멘탈이 약하다. 그래서 어떻게 장군이 되느냐”는 등의 힐난을 들어야 했다. 골프장 측이 5~6년 전 이 장군봉을 2m 정도 깎아 이전보다 넘기는 게 한결 편하게 됐다. 이 골프장을 자주 찾는 한 군 관계자는 “장군봉 높이가 낮아진 다음부터 장군이 ‘물장군’이다. 기개가 없다”고 아쉬워했다.
정치인에 대한 설도 많다. 그중에는 몇 개 홀의 경우 오른쪽 페어웨이가 설계 당시보다 넓어졌는데 그건 슬라이스를 많이 내는 박정희 대통령을 위해 넓혔기 때문이라든가 담배를 자주 피우는 한 정치인의 부인 때문에 거의 매 홀 흡연실 역할을 하는 정자를 만들었다는 내용도 있다. 또 진보 정권 시절 특전사, 문무대 등 서울 안에 있는 군 시설을 외곽으로 내보냈는데 태릉을 남겨둔 것은 유력 정치인이 골프를 좋아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1966년부터 20년간 이 골프장 소속 프로를 지낸 KPGA 조태운(81) 프로는 “박정희 대통령 이야기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나머지도 이야기 만들기 좋아하는 누군가 지어낸 얘기일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이건 아니건 태릉 골프장에는 역사가 담겨 있다.
15번 홀 ‘장군봉’ 낮아진 뒤 “물장군”
또 다른 40대 골퍼는 “박정희 대통령이 만들었으니까 묻어버리고 싶은 것 아니겠냐”고 주장했다. 반면 30대 골퍼는 “아파트값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 골프장은 다른 곳에 지으면 된다”고 말했다.
골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아파트 건설에 반대였다. 15년 경력의 한 여성 캐디는 “군 골프장은 캐디피가 민간 골프장에 비해 싸고 팁도 거의 없다. 그런데도 여기에서 일한 이유는 거리가 가까워서였다. 이 근처에 살면서 두 아이를 키웠다. 젊은 사람들은 다른 데로 갈 수도 있지만 난 이 골프장이 없어지면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 막막하다”고 말했다. 태릉 골프장에서 골프용품 숍을 운영하는 이천혁씨는 “강남 그린벨트는 두고 왜 강북의 유일한 그린벨트를 건드리는가. 이 골프장이 아파트가 된다면 가뜩이나 교통이 안 좋은 노원구 사정이 더 나빠질 것이다. 내 가게 권리는 누가 배상해주나”라고 했다.
골프 코스 설계가 송호 대표는 “한국 골프의 톱 5안에 드는 유서 깊은 태릉 골프장에 아파트를 짓겠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태릉 골프장은 일종의 유적이다. 실질적으로 정부가 소유한 88골프장이나 뉴서울은 몰라도 태릉은 지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관악 골프장은 시내에 있던 서울대생들의 시위를 싫어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서울대에 자리를 넘겨주고 경기도 화성으로 옮겨야 했다.
도시에 있는 골프장들이 외곽으로 밀려나는 건 운명이다. 여의도에 있던 공항이 김포를 거쳐 영종도로 옮긴 것과 비슷한 이치다. 태릉 골프장은 지난해 인서울 27 골프장이 들어서기 전까지 서울에 있는 유일한 골프장이었다.
그러나 꼭 없애야 하는 건 아니다. 스코틀랜드에는 오래된 골프장들이 유적 역할을 한다. 골프의 성지 세인트앤드루스 올드 코스를 비롯한 경마장 트랙 안에 있는 머셀버러 코스는 아직도 전 세계의 수많은 관광객을 끌어모은다. 골프장 플랫폼 회사인 AGL의 짐황 대표는 “태릉 골프장은 평범한 골프장이 아니다. 이를 없앤다면 동대문 야구장을 없애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조태운 프로는 “1974년 이곳에서 열렸던 한국 오픈에서 우승한 기억이 난다. 골프장을 없앨지도 모른다니 코끝이 싸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