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을 기준으로 할 때, 미술에 대한 이런 생각은 대략 150년 전부터 바뀌기 시작했다고 한다. 마네, 세잔, 고흐 같은 이른바 ‘인상파 화가’가 부각되면서부터다. 현대미술의 시작을 그 무렵으로 잡곤 한다. 작품 평가 기준이 확대되기 시작했다. 얼마나 닮은꼴을 만들어내느냐는 것은 더는 절대적 기준이 아니었다. 오히려 화가의 느낌을 표출하는 작품이 높은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아름다움과 함께 추함조차도 작품의 표현 대상에 포함되었다. 주관적 느낌이 중시되면서 객관적 기준의 비중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사법 자제”…조영남 관련 역사적 판결
‘정치 사법화’ 이어 ‘문화 사법화’ 우려
최근 대법원에서 내린 ‘조영남 판결’은 이런 미술계의 변화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조영남 개인의 캐릭터에 대한 호불호는 갈릴 수 있다. 그의 작품 수준에 대한 평가도 다를 수 있다.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선호도와 관계없이 이번 판결은 아마 한국 미술계의 ‘역사적 판례’로 기록될 것 같다. 미술뿐 아니라 문화예술 전반 나아가 사회적으로도 곰곰이 생각해볼 점이 많다.
이번 ‘조영남 판결’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사법 자제’라는 표현이다. 미술작품의 가치 평가 같은 문제에서는 사법부의 개입을 자제해야 한다는 얘기다. 현대미술의 정답을 사법부에서 찾는 시도를 삼가달라는 주문으로 들린다. 복잡한 미술 사조의 변화를 재판장이 모두 꿰고 있을 수도 없겠지만, 어떤 문제만 생기면 너도나도 정답을 찾아 사법부로 달려가는 풍조에 대한 경계로 읽힌다. 이른바 ‘정치의 사법화’에 이어 ‘문화의 사법화’ 현상까지 확산한다면 우리 사회는 무척 삭막해질 것이다.
하지만 정답을 찾으려는 욕망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정답은 권력의 다른 이름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권력은 자신이 정답이 되고 싶어 한다. 권력은 계속 정답 찾기를 요구한다. 정답을 독점하려는 탐욕을 권력 분점을 통해 해소하면서, 시민의 자율적 영역을 넓혀온 역사가 지난 우리 삶의 흐름 아니던가.
‘민주’ ‘정의’ 같은 가치도 본래는 정답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발전해 왔다. 하지만 민주나 정의가 권력의 위치에 오르자 욕망이 발동하는 것 같다. 민주나 정의조차도 정답을 독점하려고 한다. 폐쇄된 민주는 민주가 아니지 않은가. 나와 다른 목소리에 마음을 여는 태도가 바로 민주의 모습 아니던가.
문화예술이나 시민사회의 자율성이 꽃을 피우려면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권력으로부터 독립적인 목소리를 활발하게 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전문가들이 모인 시민단체는 권력의 탐욕을 견제하는 소금 역할을 한다. 시민사회의 자율성이 높아지는 추세에 역행하며 권력에 줄서기를 하는 시민단체의 시대착오적 타락은 안타까운 일이다.
배영대 근현대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