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나샘의 '교육을 부탁해'
전자라는 판단을 할 경우 그 친구의 부모에게 전화해서, 아이들끼리 어울려 놀게 하면서 부모들은 옆에서 담소를 나누면 된다. 물론 모든 부모가 모르는 사람에게 쉽게 전화할 정도로 외향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이런 관계를 형성해 두는 것이 아이와 부모 모두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안다면, 그리고 이런 문화가 퍼져 가기만 한다면 큰 거부감 없이 서로의 아이를 함께 키워갈 수 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말은 원래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에 밀리고 미국에 연합군의 지휘권도 빼앗긴 영국 국민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고안된 ‘베버리지 보고서’에 담긴 개념이다. 당시 노동부 차관이었던 윌리엄 베버리지는 정권이 바뀌어도 유지될 뼈대를 세우겠다는 의도로 이 책을 썼는데, 지금도 자본주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복지의 바이블로 꼽힌다.
지금 부모 세대가 어릴 적에는 옆집에서 놀다가, 끼니때가 되면 그냥 친구 집에서 밥을 먹는 일도 흔했다. 별생각 없이 같이 먹고, 놀다 쓰러져 잠들면 어느새 부모님 등에 업혀 오곤 했다. 마치 한 동네가 아이들을 함께 키우는 ‘요람’ 같았다. 시대가 변했지만 나는 가끔 우리 사회가 이런 역할을 해줄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해지기를 바란다.
100~120%의 수익 실현 때문에 사람을 내치기보다, 그저 먹고살 만하게 70~80%를 추구하면서 직원의 삶을 보듬는 기업이 많은 사회. 효용을 따져 사람마저 재빠르게 ‘손절’하는 게 아니라, 참을성 있게 보듬고 타일러서 함께 성장시키는 사회. 자녀의 성과로 과시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지를 알고, 함께 사람을 변화시키고 의미를 부여하는 일에 총력을 기울이는 사회.
하지만 현실은 시퍼렇게 벼려진 칼날과 같다. 경쟁 사회 속에서 떠올리는 부질없는 꿈이지만, 약간의 역설적인 실마리가 있다. 최근의 코로나가 기존의 통념을 부수는 단초가 되어준 까닭이다. 계층 간의 장벽은 너무나 단단해 보였는데, 생각보다 사회는 훨씬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는 지가 나에게 직접적 영향을 준다. 타인의 적절한 대처가 나에게 도움이 되고, 반대로 개념 없는 행동은 나에게 불이익이 된다. 사회 전반의 교육 수준이 올라갈수록 내가 행복해진다. 남의 자녀가 잘돼야 내 자식도 잘된다. 이런 의식이 하나하나 모이면 ‘요람 사회’로서의 기초가 될 수 있는 건 아닐까.
최근 미국에서 발생했던 ‘조지 플루이드’ 사건 폭력 시위도, 그 안을 들여다보면 소득 격차, 계층 격차, 교육 격차에서 발생한 분노가 주원인이 되는 것이다. 내 자녀가 속한 이 사회를 건강한 생태계로 만들어가는 것이 내 자녀를 위한 길이다. ‘남보다 뛰어나서’ 행복한 사회가 아니라 ‘서로 보듬어가면서’ 행복한 사회로의 한 걸음, 먼저 내 자녀 주변의 아이 한 명에서부터 시작해 보면 어떨까? 물론, 이를 위해서는 뭔가 과시하고 싶은 마음, 그리고 서로의 격차에 대한 자의식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자녀들보다도 어른들의 성장이 갈수록 더 요구되는 이유다.
지하나 덕소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