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 이석렬의 인생은 안단테(15)
그러다가 3월 14일에 그곳으로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제자였던 요시프 코테크가 찾아와 스승에게 예의를 표하고 랄로의 ‘스페인 교향곡’ 악보를 보여주었는데, 이때 작곡가는 이 곡에서 몹시도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것 같다. 두 사람은 이 곡을 함께 연주했으며 작곡가는 자신도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하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 후에 바이올린 협주곡은 무척이나 빠르게 완성되어 갔고 작곡가는 역사적으로 상당히 유명한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하기에 이른다. 차이콥스키는 당시의 열망에 대해서 후원자인 폰 메크 부인에게 이렇게 썼다.
“오늘 아침 나는 불타는 영감으로 한없이 타올랐습니다. 내가 작곡한 이 협주곡이 심장을 파고들만큼 강력한 음악이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듭니다!”
그리고 이 협주곡과의 운명적 인연에 대해서는 이렇게 썼다.
“이 협주곡은 작곡하는 내내 즐거웠고 처음부터 왠지 모르게 끌렸습니다. 이런 식의 속도라면 예상보다 빠르게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침내 4월 4일에 협주곡의 작곡이 끝났다. 그러나 차이콥스키는 2악장이 곡의 전체 구성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처음에 작곡했던 2악장을 포기하고 또 다른 2악장을 썼다. 4월 11일에 악보의 초고가 나왔다. 그렇지만 이렇게 완성된 명작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까지 또 다른 우여곡절을 거쳐야 했다.
작곡가는 이 곡을 완성하는 데 도움을 준 코테크가 협연자로서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베를린에서 요아힘에게 바이올린을 배우고 있던 코테크는 이 곡의 연주를 망설였다. 초연자로 나서기가 두려웠던 것인지 아니면 존경하는 스승의 반열과 함께 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것인지 그는 이 곡의 초연을 하지 못했다.
10월에 가서 차이콥스키는 당대 최고의 러시아 바이올리니스트인 레오폴드 아우어에게 이 곡의 악보를 보여주었다. 그렇지만 아우어 역시 이 곡의 연주를 거부했다. 당시 아우어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이 작품을 바이올린에 맞게 고치지 않는 한 이걸 그대로 연주할 수는 없소!”
그러다가 이 곡은 작곡가도 예상치 못한 무대에서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모스크바 출신으로 라이프치히 음악원에서 교수로 있던 아돌프 브로드스키가 1881년 12월 4일에 빈 필하모닉 협회의 콘서트에서 한스 리히터의 지휘로 초연한 것이다. 차이콥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 악보를 처음 본 순간부터 이 작품을 동경해온 아돌프 브로드스키가 이 곡의 연주를 세상에 선언한 것이다. 초연자 브로드스키는 1882년 4월에도 런던에서 이 곡을 협연함으로써 곡의 위상을 국제적으로 승격시켰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작곡가는 원래 예정되었던 헌정자 레오폴드 아우어 대신 브로드스키에게 이 작품을 헌정했다.
그때부터 브로드스키는 전 유럽을 돌아다니면서 이 협주곡을 연주했고 1890년대 초에는 미국에 가서도 이 곡을 연주했다고 한다. 브로드스키의 열정과 노력으로 차이콥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청중들의 찬사를 받기 시작했고 국제적으로 유명한 음악이 되어갔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이 곡의 연주를 거부했던 아우어 역시 차이콥스키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에 이 작품을 연주했다고 한다. 나중에 가서 이 작품의 뛰어난 해석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아우어는 자신의 제자들에게도 이 작품을 줄곧 가르치는 스승이 되었다. 아우어는 이 곡의 연주를 자신의 제자인 하이페츠에게도 가르쳤지만 이 곡을 세상에 알린 명연주자는 아돌프 브로드스키였던 것이다.
음악평론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