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어릴적 마지못해 먹던 양하, 이젠 반가운 '고향의 맛'

중앙일보

입력 2020.05.2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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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양은심의 도쿄에서 맨땅에 헤딩(44)

2020년 초반부터 코로나 사태는 사람들을 집안에 묶어 놓았다. 먼 거리 이동을 허락하지 않았다. 한국행 비행기 표를 취소했다. 마음이 헛헛하여 동영상 서비스로 한국영화를 보며 대리만족을 했다. 취미인 옥상정원 가꾸기에도 열을 올렸다. 가드닝에 관한 검색을 하던 중 제주도에서 먹었던 ‘양하’를 발견했다. 고향의 맛이다. 클릭했다.
 
뿌리를 사 놓고는 뭐가 그리 바쁜지 한동안 방치했다. 시들지 않았는지 걱정이었지만 햇빛이 그리 들지 않고 습한 곳에 심었다. 이주일 쯤 지났을까? 새순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올해부터 수확을 기대하는 것은 염치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한여름 소면을 먹을 때 실파와 같이 양념으로 쓸 수 있기를 바라본다. 내후년쯤엔 나물을 무치거나 피클을 만들 수 있을 정도의 양을 수확할 수 있으면 하는 엄청난 욕심도 부려본다.
 

양하와 시소. 여름하면 떠오르는 일본의 전통적인 향신 채소이다. [사진 photoAC]

 
‘양하’를 모르는 사람도 많을 듯싶다. 제주도에서는 ‘양애’ 혹은 ‘양애깐’이라고 한다. 내가 자란 초가집 지붕 밑에는 ‘양애’가 자랐었다. 누가 돌보지 않아도 무던하게 자라서 매해 식탁에 올라왔다. 매해 먹었음에도 나는 일본에 와서 시어머니가 화분에서 키우는 양하를 볼 때까지 내가 먹었던 것은 봉오리라는 것을 모르고 살았다. 땅에서 솟아났으니 새순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성한 잎사귀로 가려져 있었던 것은 새순이 아니라 봉오리였다. 시어머니의 화분에서 그 꽃을 처음 보았을 때의 감동이라니. 여리고 연한 노란 꽃이었다.
 
철만 되면 나물이 되고 장아찌가 되어 올라왔지만, 그 독특한 향은 아이였던 나의 입맛에는 맞지 않았다. 식감 또한 독특하다. 어른이 맛있어했는지도 의문이다. 생활고에 시달리는 가난한 농가였으니 맛이 있고 없고를 따지는 것 자체가 배부른 소리였을 것이다.


그 아이가 이제 중년이 되어 양하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특히 피클을 좋아한다. 음식점에 가서도 있으면 꼭 주문할 정도이다. 결국에는 키우기까지에 이르렀다. 참, 양하 장아찌를 참기름으로 볶으면 향이 부드러워져서 맛있었던 것 같다. 군침이 돈다.
 

화분에서 키우는 양하. 일본에서는 화분에 키우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향신 채소이니 조금 있으면 족하기 때문이다. [사진 photoAC]

 
일본에 와서 놀란 것 중의 하나는 슈퍼에서 양하를 팔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것도 슈퍼에서 파네?’ 반가움이라기보다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하찮게 여겼던 양하가 도쿄의 슈퍼에서, 그것도 두세 개만 감질나게 포장되어 귀한 몸으로 손님을 기다린다. ‘아이고, 이걸 가지고 뭘 해 먹어.’ 싸지도 않다. 나물 무치기는 글렀다. 그야말로 양념으로나 먹어야지. 한국에서는 9월이 철이라는데 일본에서는 여름에 사랑받는 야채다. 주로 향신 채소로 쓰이니 두세 개면 충분하다.
 
제주도 이외의 지방에서 양하를 먹지 않는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김서령의 『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라는 책에 제주도에서 양하를 처음 먹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안동에서 나고 자라서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전국으로 취재하러 다니던 사람이 제주도에서 처음으로 먹어봤다니. 의외였다. ‘역시 양하는 제주도에서만 먹는구나’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번에 검색해 보고 전라도나 경상도 쪽에서도 먹는다는 것을 알았지만 말이다.
 
‘양애’의 표준어가 양하라는 것도 일본에 와서 알았다. 일본에서는 ‘묘가(ミョウガ)’라고 한다. 20여년 전 묘가는 ‘양애’임이 분명한데, 표준어로 무엇이라고 하는지 찾아보고 나서야 ‘양하’라고 한다는 것을 알았다. 양하는 마이너 야채였다.
 
이 글을 쓰며 양하에 대해 검색해 보았다. 제주도 특산물이라고 소개하는 글이 많다. 옛날에는 추석이나 제사상에 올라왔었다는데, 그 기억은 없다. 요즘은 초가집 처마 밑에서 자라는 양하를 볼 수는 없다. 아직도 남아있다면 제대로 봐 보고 싶다.
 

피클(츠케모노). [사진 photoAC]

양하 냉우동 양념. [사진 photoAC]

 
양하 요리를 소개하는 글을 보며 입꼬리가 올라갔다. 괜히 내가 아는 사람이 유명해지고 있는 것처럼. 나물 무쳐 먹고, 장아찌나 피클 담그고, 무더운 여름 비빔면이나 냉국수에 향신 채소로 곁들여도 좋겠다. 그 독특한 맛과 향기에 익숙해지면 여름만 되면 생각이 날 것이다. 내 기억에 남아있는 맛은 된장으로 무친 나물과 장아찌를 참기름에 볶은 것이다. 향신 채소가 아닌 훌륭한 야채였다.
 
어렸을 때는 마지못해서 먹었던 양하가 그리워진다. 아이들이 반가워하지도 않는 음식을 차려낼 수밖에 없었던 시절의 부모 마음을 생각하면 짠하다. 내 새끼가 먹고 싶어 하는 걸 주지 못하는 부모의 마음이 어떤지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올봄에 심은 양하가 올여름부터 봉오리를 올려줄지는 모르겠으나, 타국의 내 집에 고향을 들여놓은 기분이다. 양하 싹을 보며 초가집 처마 밑을 떠올린다. 깻잎도 키우고 있으니 든든하다. 양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이다. 비록 화분 하나일지라도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풍요로워진다. 일본에는 깻잎 비슷한 ‘시소’라는 것이 있다. 깻잎보다 잎이 부드럽고 향이 좀 약하다. 깻잎이 그리울 땐 시소를 쌈 야채로 쓰곤 한다.
 
올여름 한 번쯤은, 귀해서 몸값이 나가는 양하로 나물을 무쳐 먹어야겠다. 한 번쯤은.
 
한일출판번역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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