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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결혼 25년만에 내 부엌이 생겼다, 자유를 느꼈다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양은심의 도쿄에서 맨땅에 헤딩(43)

지난 41회 글은 ‘죽으면 일본에 뼈를 묻겠다’라는 각오를 다지고, 집을 수리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내 인생의 마지막 둥지를 제주도와 도쿄 어디에 틀까 고민하던 시기가 있었다. 외국살이어서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시부모와 함께 살아온 집을 내 인생의 마지막 둥지로 선택하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하지만 그 마음의 시작은 시어머니를 보내고 주방 공사를 하면서 시작되었지 싶다. 주방은 시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나의 영역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집은 시부모님 것이었기에 무엇 하나 내 마음대로 바꿀 수가 없었다. 쓰레기통 하나조차도.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 시아버지까지 주방에 관심을 잃었고 가벼운 치매 증상까지 나타났다. 그렇게 주방은 나의 영역이 되었다. 결혼 후 약 25년 만이었다.

시어머님이 키우시던 꽃들. (왼쪽부터) 동백, 수사해당화, 명자꽃 등 시어머니가 남긴 꽃이 꽤 된다. 올해도 봄을 맞아 하나 둘 피어나기 시작했다. [사진 양은심]

시어머님이 키우시던 꽃들. (왼쪽부터) 동백, 수사해당화, 명자꽃 등 시어머니가 남긴 꽃이 꽤 된다. 올해도 봄을 맞아 하나 둘 피어나기 시작했다. [사진 양은심]

싱크대 밑에 물이 새는지 곰팡이가 생기고 쿰쿰한 냄새가 났다. 장마철이 오기 전에 고쳐야 한다는 절박함에 공사를 했다. 가벼운 치매 증상은 있으나 ‘내 집’이라는 의식이 남아있던 시아버지가 노여워했다. 집주인 허락도 없이 공사한다고. 그리고 한마디 덧붙인다. “마음대로 하려거든 이 집에서 나가라.” 치매 노인이 한 말이라고 넘길 수도 있었지만 한마디 했다. “그러세요. 혼자서 잘 살아보세요. 저는 내일 한국으로 갈게요!” 마침 집에 와 있던 요양사 말로는 조금 반성하는 듯하더라고 했다. 큰아들로서 평생 누구에게 싫은 소리 한 번 들어본 적이 없는 시아버지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기가 센 한국 며느리를 맞이했다. 친척을 통 틀어도 시아버지에게 의견을 말하는 건 한국 며느리인 나뿐이다. 이 말은 뒤집어 보면 진정으로 대하는 사람은 나뿐이라는 해석도 된다. 단기 기억장애라는 치매 증상으로 며느리의 말을 잊은 시아버지와 할 말을 하고 서운한 감정을 털어버린 며느리의 관계는 나쁘지 않다. 주방 공사를 마치고 난 후의 느낌은 ‘이제야 내 주방이 생겼네’였다. 자유를 느꼈다. 계속 이 집에서 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꿈틀거렸던 것 같다.

마지막 둥지를 틀기 위해서는 집 관리가 필요했다. 좀 있으면 지은 지 30년인 집. 시아버지가 결혼하는 아들과 같이 살려고 지었다고 하니 내 결혼생활과 연수가 비슷하다. 외벽 방수공사를 하는 김에 시부모가 창고로 쓰던 방 공사까지 맡겼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조금씩 물건을 정리했으나 좀처럼 끝이 나지 않았다. 적어도 20여년 동안 쓰인 적인 없는 물건이 가득했다. 일하면서 틈틈이 정리하다 보니 시간이 오래 걸렸다. 빈 곳이 늘어날 때마다 보람을 느끼기도 했지만, 여전히 방을 차지하는 물건을 보며 막막했다.

왜 이 물건을 쌓아놓고 계셨을까. 정리하다 드는 생각은 소중해서라기보다는 있다는 것조차도 잊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정리하고 싶어도 체력도 기력도 떨어져 할 수가 없었을지도 몰랐다. 딸이라면 싸우면서라도 치우라고 하겠지만, 며느리는 그럴 수가 없다. 며느리에게는 ‘쓸데없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 시부모에게는 소중한 추억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짐 정리를 하며 ‘물건에 정을 주지 말아야 해’라는 생각이 강해졌다. 객관적으로 필요한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어야 하는데, 추억이 있으면 좀처럼 버리겠다는 결심을 하지 못한다. 나 또한 그렇다. 입지도 못하는 옷을 왜 가지고 있는지.

일본에서는 부모가 세상을 뜬 후 짐 정리를 전문 업자에게 맡기는 경우도 많다. 오죽했으면 전문 업자가 생겨났을까. 나는 고작 방 하나를 정리하는데도 2년이 걸렸다. 따로 살았던 집이라면 집 전체를 정리해야 하니 엄두도 안 났을 것이다. ‘미니멀 라이프’란 별다른 게 아니지 싶다. 쓰지 않는 물건을 품지 않는 생활이다. 있는지조차 모르는 물건을 쌓아두어서는 그 공간이 가엽다. 시부모의 짐을 정리하며 다짐했다. 가능한 한 내 짐은 내 손으로 처분하자. 내가 죽고 난 후 누군가의 부담이 된다고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몸이 움직여지지 않을까. 이런 생각 또한 일상에 묻혀 잊힐지 모르지만, 기회가 있을 때마다 되새기려 한다. 정말 필요한 것만 옆에 두고 살자.

시어머니 짐을 정리하다가 얻은 마음에 드는 유품 손톱깎이. 필통에 넣어 다니고 있다. 오래도록 애용하게 될 것 같다.

시어머니 짐을 정리하다가 얻은 마음에 드는 유품 손톱깎이. 필통에 넣어 다니고 있다. 오래도록 애용하게 될 것 같다.

우리의 삶에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이번 코로나19를 치르며 새삼 인식하게 되었다. 사람에 따라, 각 가정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겠지만 많은 물건이 필요치 않음이 확실해졌다. 한동안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이어질 듯하다. 이참에 필요 없는 물건을 쌓아놓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시어머니는 워낙에 검소했던 분이다. 방 하나를 다 정리했지만 허무할 정도로 남는 게 없었다. 가장 마음에 드는 건 필통에 쏙 들어가는 자그마한 손톱깎이다. 평생을 들고 다니며 쓰게 될 것 같다. 그리고 시어머니가 키우시던 꽃나무들. 올봄에도 하나둘 피어나기 시작했다. 꽃에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의미가 없는 것이겠으나 나에게는 아주 소중한 시어머니의 유산이다.

한일출판번역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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