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값 잘 내던 대식가 김기창, 체하면 찾던 조깃국은 장모이름

중앙일보

입력 2020.05.23 00:21

수정 2020.05.23 01:14

SNS로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예술가의 한끼] 청각장애 천재화가

운보 김기창. [서울미술관]

운보 김기창(1913~2001)은 후천성 청각장애인이다. 여덟 살이 되자 서울 인사동 승동보통학교에 입학했다. 봄소풍을 갔다 오고 나서 장티푸스에 걸렸는데 인삼을 달여 먹은 것이 화근이 돼 고열에 시달리다 귀가 먹었다. 선천적으로 성격이 밝았던 탓에 장애를 크게 의식하지 않고 활달한 모습을 보였다. 운동도 잘하고 공부도 잘했다. 특히 글짓기를 잘했다.
 
모녀가 축음기를 듣는 장면인 정청(靜聽 1934), 농악을 연주하는 농민들의 모습을 그린 흥락도(興樂圖 1957), 바라춤(1961), 탈춤(1961), 그가 태어나 자란 권농동 근처 비원 앞에 있었던 국립국악원을 연상케 하는 아악의 리듬(1967), 세 악사(1970년대) 등 소리가 주제인 그림을 김기창은 많이 그렸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 말년의 베토벤이 위대한 작곡을 했듯이, 초년부터 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말도 어눌했던 김기창은 오감을 넘어선 사물과의 섬세한 조응으로 내면의 소리를 들으려 했고(정청), 리드미컬한 운필을 통해 누구보다 아름다운 큰 울림의 노래를 불렀다(세 악사).

8세 때 장티푸스 앓은 뒤 청각장애
내면의 소리 녹인 동시도 잘 지어
모친 권유로 이당 김은호 문하에

6·25 때 그린 ‘예수의 생애’ 연작
독일 ‘종교개혁 500년전’서 큰 호응

인사동 일억조·선천, 낙산가든 단골
한복에 고무신, 빨강 양말 패션도

아내 우향 박래현, 운보에게 구화 가르쳐


‘아기 예수의 탄생’, 1952, 비단에 수묵채색, 63x76㎝. [서울미술관]

교사라는 새 직장이 생긴 어머니 한윤명을 따라 개성으로 전거하게 돼 그렇지 않아도 병 치료를 해야 했던 소년 김기창의 학업에 공백이 크게 생겼다. 김기창은 17세의 늦은 나이로 승동보통학교를 마치자 어머니의 적극적인 권유로 이당 김은호(1892~1979)의 문하로 들어갔다. 반년 만에 선전에 입선했다. 이때 어머니로부터 운포(雲圃)라는 화명을 받았다. 화가로서 승승장구했다.
 
1943년 김기창에게 큰 사건이 생겼다. 나중에 부인이 될 우향 박래현(1920~1976)과의 만남이었다. 우향은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 3학년 재학 중에 선전에 특선했다. 최고의 인텔리 여성과 장애인 천재화가의 만남은 아슬아슬했다. 예술적 동지가 된 둘은 세속적 조건들을 뛰어넘어 해방 이듬해에 결혼했다.
 
해방이 되자 김기창은 호를 운포(雲圃)에서 운보(雲甫)로 바꾸었다. 포(圃)에서 에운 담을 없애고 보(甫)가 된 셈인데, 과연 그의 삶은 경계 없이 추상, 구상, 목판화 등 여러 장르의 그림을 그려 가며 경계 없이 지구촌 곳곳을 돌아다니는 팔자가 됐다.
 
우향은 운보에게 구화를 가르쳤다. 우향의 지도에 따라 상대방의 입모양을 보고서 말뜻을 알아채는 훈련을 했다. 소리가 들리지 않기에 그의 발음은 불완전했고 그만큼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그는 어떡하든 표현을 했다. 동작, 표정, 눈빛 등을 다 동원해서 입체적으로 자신을 뜻을 상대방에게 전달했다. 홍익대, 수도여사대(세종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에 불편함이 없었다. 발음이 어눌했지만 크게 열린 마음으로 상대방을 포용했다.
 
6·25전쟁이 나자 처가가 있는 군산으로 피난을 갔다. 처음에는 군산비행장에 근무하는 미군들을 상대로 초상화를 그려 생계를 유지했다. 이윽고 백화양조의 강정준 사장이 구암동에 집을 구해다 화실을 꾸며 주었다. 1952년과 53년 구암장에서 ‘예수의 생애’ 연작 29점을 제작했다. 한국인의 모습을 한 예수에다 성경의 현장을 한반도로 옮긴 그림이었다. 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54년 4월, 서울 화신백화점에서 ‘예수의 생애’ 연작으로 전시했다. 이때 독일인 신부가 예수의 부활도 그렸으면 좋겠다는 제안을 했다. 운보가 이를 받아들여 2년 뒤 예수의 ‘부활’이 완성되었고 연작은 30점으로 늘어났다. 2017년 독일역사박물관에서 ‘종교개혁 500년: 루터 이팩트’전이 열렸다. 마틴 루터가 이끈 종교개혁의 역사적 성공을 증명하기 위한 이 전시회에 출품된 운보의 ‘예수의 생애’ 30점 연작은 큰 호응을 얻었다.
 
운보는 대식가다. 보통 사람의 두 배 정도는 먹는다. 밥 사는 걸 좋아해서 여러 사람이 식사를 하면 꼭 운보가 계산했다. 큰 덩치에 소탈한 성격이라 아무거나 다 잘 먹는다는 인상을 주었지만, 나름 미식가였다. 문재가 뛰어난 그는 아름다운 수필을 많이 남겼다. 음식취미에 관한 글도 많다.
 
“흰 두부 위에 고추장이 알맞게 끓여져 있는 데다가, 쇠고기 서너 조각과 파란 파를 썰어 넣어서 만든 것으로 두부가 어찌나 알맞게 끓여져 있는지 계란 삶은 것보다 더 부드럽고 나긋나긋해서 입속에 떠 넣으면 짭짤한 고추장맛과 함께 스르르 녹아 목구멍 속으로 미끄러져 떨어진다”(월간 중앙 1970년 3월호). 1940년 당시 작품제작을 할 때 허기졌던 자신의 모습과 두부찌개가 몸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감각적인 문장으로 표현했다.
 
대식가라 과식을 하기 일쑤였다. 과식으로 식후체증을 일으키면 연평도에서 잡아 온 조기를 쑥갓에다 고추장을 풀어 넣고 끓인 조깃국을 찾았다. 하필이면 그의 장모, 그러니까 우향의 모친 함자가 조기국(趙基菊)이었다. 조깃국을 먹을 때마다 왠지 실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민화 즐겨 수집 ‘바보산수’ 연작에 영향
 

박래현, 김기창 부부(왼쪽)와 이응로, 박인경 부부. 파리 이응로 작업실, 1965년. [서울미술관]

운보는 갈비구이를 좋아했다. 인사동길 통문관 맞은편에 그의 전담 표구점인 동문당이 있었다. 인사동에 나오면 인사동 초입의 갈비집 일억조와 한식집 선천을 들렀다. 대학로의 낙산가든 역시 그의 단골이었다. 음식을 삼킬 때마다 남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몸속의 소리를 듣지는 않았을까. 말년의 그는 한복을 즐겨 입었다. 흰 고무신에 빨강 양말의 매치는 MLB 보스턴 레드삭스 야구팀 감독을 방불케 했다.
 
남성미 만점의 운보와 식물성 체질의 수화 김환기, 이 둘은 묘하게 닮은 데가 많다. 둘 다 문재와 감식안이 뛰어났다. 수화가 백자항아리에 탐닉했다면 운보는 민화를 즐겨 수집했다. 운보의 경력 중에는 1947년 조선민속박물관 미술부장이란 직함이 있다. 이때부터 민화에 관심을 가졌다. 미술인으로서는 거의 최초의 민화 수집가였다. 까치, 호랑이 등 훌륭한 민화들은 안목가인 운보의 몫이 되었다. 민화의 꾸밈없는 정신성은 나중에 그의 작품 바보산수 연작으로 이어졌다.
 
그가 선배로서 존경한 화가는 고암 이응로였다. 구상, 추상, 입체 등 장르를 가리지 않는 이응로의 열린 창작정신이 자신의 체질과 통했다. 파리 여행에서 남관과 이응로를 찾아가 만나기도 했다. 그는 동료들에게 애틋했다.
 
1972년 이중섭 유작전이 현대화랑에서 열렸다. “너(소)의 크고 순진한 눈에 눈물이 고여 내 마음을 적시는구나! 죽어 다시 살아 모여서 에메랄드 마냥 찬란히 빛나는 그대여! 영원의 현대에 살지어다. 이중섭아 고히 잠드시라.” 운보가 이날 떠올린 감회를 방명록에 남긴 글이다.
 
“운보여 고이 잠드시라”라고 할 친구들도 다 사라진 빈 하늘에 매암이와 쓰르람이가 부질없이 운다.
 

황인 미술평론가

황인 미술평론가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전시기획과 공학과 미술을 융합하는 학제 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현대화랑에서 일하면서 지금은 거의 작고한 대표적 화가들을 많이 만났다. 문학·무용·음악 등 다른 장르의 문화인들과도 교유를 확장해 나갔다. 골목기행과 홍대 앞 게릴라 문화를 즐기며 가성비가 높은 중저가 음식을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