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자이델 재단과 함께하는 독일 통일 30돌 〈7〉
동독은 파산 상태였다. 경제 전반에 만연한 문제를 비롯해 미약한 동기 부여, 만성적인 물자 부족으로 인해 일상이 된 긴 줄서기 등 사회주의의 구조적인 취약점들이 드러났다.
기업 8500개, 사업장 4만5000개
슈타지·인민군 재산 등 관리 대상
초대 청장, 적군파에게 암살당해
민영화 작업 곳곳서 난관 부닥쳐
신탁관리청 성과 두고 평가 갈려
우리는 어떤 방식 택할지 불확실
하지만 많은 서독 관계자는 동독이 산업 부문에서 꽤 성과를 거두고 있는 체제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실제로 동독 사회의 빗장이 풀리자 이러한 판단이 완전히 잘못됐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수십 년간 투자가 이루어지지 못해서 자본재들은 완전히 낙후돼 있었다. 전 산업 분야에 있어서 기술 또한 수십 년 전의 상태에 머물러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에 따른 심각한 환경 문제도 대두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민 소유의 사업장들과 사회주의의 재벌이라고 할 수 있는 대규모 콤비나트들을 어떻게 운용해야 했을까? 사회주의 정권의 말기에 이 주제에 관한 활발한 토론이 이루어졌다. 시민운동가들은 인민의 재산을 일종의 주식과 같은 형태로 인민들에게 직접 분배하자고 주장했다. 이는 후에 체코슬로바키아가 행했던 방식이다.
인민회의 자유 총선을 치르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총선 이후 민영화 작업이 체계적으로 진행됐으며 이를 통해서만 지속적인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1990년 6월 17일 민영화와 인민재산 재편에 관한 법률(신탁관리법)이 제정됐다. 이에 따라 신탁관리청은 한동안 세계에서 가장 큰 기업이 됐다. 신탁관리청의 사업 범위에 포함되는 기업의 수는 8500개였으며 사업장 숫자는 총 4만5000여 개 그리고 근무 인력은 400만 명 이상이었다. 약 240만㏊의 부동산, 국가보위부(슈타지)가 보유했던 재산과 동독 인민군 소유의 부동산, 다수의 주택과 국영 약국 등도 신탁관리청의 관리 대상에 속했다.
130명의 직원으로 출범한 신탁관리청은 예전 동독 대외경제부 건물에서 업무를 시작했으나 신탁관리청의 활동에 대한 불신이 강했다. 맡은 과제가 동독경제 청산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법률상의 불확실성과 다툼의 소지가 매우 컸으며 이는 투자를 방해하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재산 관계가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해당 기업이나 토지에 대한 투자가 이루어지기 어려운 것은 당연하다. 게다가 많은 기업은 경쟁력이 전혀 없었으며 이러한 현상은 1990년 7월의 화폐 개혁 이후 서독마르크화로 화폐 통합이 이루어진 다음에 더욱 심해졌다. 동독의 기업들은 수십 년 동안 국가로부터 지원을 받아 왔으며 환경이 바뀌면서 대량 해고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면서 실업률은 급속하게 치솟았다.
호텔이나 식당 또는 작은 가게 등과 같은 소규모 업체들을 민영화하는 작업은 상대적으로 간단했다. 그러나 경영자 매수(MBO·Management-Buy-Out)를 통한 기업 민영화는 사전 회생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았다. 신탁관리청이 활동했던 1990~94년 약 2만 개의 새로운 기업이 생겨났으며 2100억 마르크의 투자가 이루어졌고 150만 개의 일자리를 지켜낼 수 있었다.
신탁관리청이 한 일에 대한 평가는 쉽지 않다. 일각에서는 신탁관리청이 일관성 있게 수행했던 민영화 작업이 구동독의 많은 지역에서 경제가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이 됐다고 평가한다. 반면에 또 혹자는 그것이 독일이나 유럽연합(EU) 차원의 지원에 비하면 미미한 성과를 보였다는 의견을 밝히기도 한다.
구동독 SED 자금, 러시아로 새기도
농업 분야의 협동농장 자산 배분에 있어서도 이전 동독의 많은 간부가 혜택을 본 경우들이 비일비재했다. 이런 여러 사건과 문제점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당시 독일이 인민자산에 대한 대규모 민영화 작업의 경험이 거의 없었음에도 신탁관리청을 설립해 수행했던 방식이 폴란드나 소련 또는 체코슬로바키아와 같은 인근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사례와 비교했을 때 전체적으로 더 지속적이고 공정하며 성공적인 성과를 거두었다는 건 분명하다. 에스토니아도 후에 이러한 독일의 사례를 따랐다.
독일이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물론 서독 측의 막대한 인력과 자금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반도가 통일 국면에 접어드는 시점에 한국이 어떤 방식을 택하게 될 것인지는 아직 불확실하다. 하지만 완전히 피폐한 경제를 살려내야 하는 매우 어려운 입장에 봉착하게 되는 상황은 통일 당시의 독일과 매우 유사할 것이다.
※ 번역: 김영수 한스 자이델 재단 사무국장
독일 킬대학 경제학 석·박사, 파리1대학 경제학 석사, 1998~2002년 한국외국어대 국제지역학대학원 전임강사, 2004~2006년 서울대 행정대학원 겸임교수, 2007년부터 독일 비텐-헤르데케대학 객원교수. 2002년부터 한스 자이델 재단 한국 사무소 대표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