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적 창조의 계보
후쿠시마 료타 지음
안지영·차은정 옮김
리시올
반일감정이 여전한 지금 웬 일본문화론인가 싶다. 하지만 일본의 독특한 시각문화가 일찌감치 서양의 인상파에게 영감을 줬다거나 하는 흔한 기호론적 찬미가 아니다. 작은 섬나라 일본이 어떻게 ‘대일본제국’ ‘대동아공영권’을 꿈꿀 수 있었는지를 문화적 배경에서 찾은 의미심장한 문예비평서라 주목할 만하다.
‘재앙 후 부흥’ 패턴 반복돼
패전 폐허가 애니메이션 토양
사실 둘 다 맞다. 꽃꽂이와 다도, 정원과 같은 생활문화를 창조한 것이 와비사비, 무상관 같은 손때묻은 일본적 미학이다. 하지만 대재해 이후 역사의 웅덩이 같은 시기에 놓인 지금은 부흥 문화의 역사 속에 들어 있는 ‘다시 일어서기 철학’을 재발견하는 것이 문명론적 과제일 수 있다.
저자는 중국문학사를 전공한 거시적인 안목을 바탕으로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재난 이후 일본 문학의 양상’에 현미경을 들이대 일본이 문학적 상상력을 증폭시켜 온 역사를 반추한다. 하루키와 같은 세계적 작가는 물론 만화·애니메이션 같은 서브컬처에 이르기까지, 콘텐트 강대국이 될 수 있었던 비밀을 파헤치는 것이다.
가상의 내셔널리즘으로 세뇌당한 일본인의 애국심은 메이지, 쇼와에 이르기까지 국가가 아닌 천황에 대한 사적이고 에로스적 사랑에 갇혔다. 러일전쟁 이후 근대문학에서 시민사회를 구성하는 ‘우리’의 관점이 확립되지 못한 것도 그래서다. ‘고독하고 불쾌한 나’의 타자화에 침잠했던 ‘국민작가’ 나쓰메 소세키의 위상이 일본인의 집단주의가 허구임을 드러낸다.
오히려 일본은 가짜 애국심을 내세웠을 뿐 ‘국민으로서의 우리’라는 개념 정립에 실패했다. 전시에도 이탈리아나 독일이 그랬던 것처럼 건축과 예술로 나치식 국가심미주의를 창조하지 못하고 근검절약에 기초한 빈곤의 미학에 그쳤던 것이다. 대신 ‘미의 극장의 관객으로서의 우리’를 창조한 게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에도가와 란포, 미시마 유키오다. 저자는 ‘언제 정치가 미를 주도한 적 있었냐’며, ‘관객 혹은 대중으로서의 우리’를 미적 판단의 주체로 내세운다.
20세기 세계를 제패한 애니메이션의 양상을 돌아봐도 그렇다. ‘철완아톰’의 데즈카 오사무가 초토화된 땅에 디즈니적 기호를 이식해 일궈놓은 문화적 토양에서 미야자키 하야오가 ‘대일본제국’이라는 상상 속의 일본을 되살려낸 것이다. 하루키의 ‘무상관’에도 이면이 있다. 상실과 멜랑콜리가 부유하는 그의 문학도 결국 상실의 시대에 그 막연한 상실감을 기괴한 상상력으로 전환하는 게 본령이다. 결국 재난 이후 문화적 부흥은 국가가 아니라 대중에게 달려 있다는 얘기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