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도 여자도 아니다…진격의 문화 코드 ‘그들’

중앙일보

입력 2020.03.07 00:02

수정 2020.03.12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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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젠더 장벽

최근 성전환 수술 후 강제전역 당한 변희수 하사와 성전환 학생 A씨의 숙명여대 입학 포기로 성소수자 이슈가 급부상했다. 서울 지역 6개 여대 21개 단체는 “여성의 권리를 위협하는 성별 변경에 반대한다”는 성명도 냈다. ‘제 3의 성’에 대한 우리의 사회적 이해도가 아직 낮고, 제도와 규정도 미비하기에 벌어진 논란이다.

 

1 구찌의 2020 FW 멘즈 컬렉션. 지난해에 이어 젠더 해방 컨셉트다. 2 연극 ‘조지아 맥브라이드의 전설’ 속 드랙퀸들. 3 BTS가 올핑크 패<br>션으로 등장한 ‘작은 것들을 위한 시’ 뮤직비디오. [사진 구찌 코리아·댄 레카, 쇼노트, BTS 공식 홈페이지]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국내 트렌스젠더는 최대 25만명으로 추정되지만, 아직 우리 사회에서 젠더 장벽은 견고하다. 지난해 영화 ‘82년생 김지영’ 개봉 당시의 페미 논란 등 심심찮게 불거지는 젠더 전쟁도 ‘남성 대 여성’이라는 젠더 이분법을 전제로 한다.

‘제 3의 성’에 대한 사회적 논란
국내 문화예술계에선 포용 단계
사전엔 ‘남성·여성 아닌 개인’
‘이분법’ 넘어서는 인식 대두

 
영미권에서는 ‘제 3의 성’을 인정하는 추세다. 2019년 미국의 어학사전 메리엄 웹스터는 올해의 단어로 ‘They’를 선정하며 ‘그들’이라는 복수대명사 외에 ‘남성도 여성도 아닌 성별을 지닌 개인’이라는 의미를 새로 추가했다. 한 해 동안 메리엄 웹스터 사이트와 앱에서 ‘They’의 검색 횟수가 전년대비 313% 증가한 것은 단어의 의미가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며, 인쇄물과 SNS에서도 ‘제 3의 성’을 지닌 개인을 지칭하는 단수대명사로 사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하와이 등 일부 주 정부는 신분증의 성별 표기에 ‘남(M)’과 ‘여(F)’ 외에 ‘기타(X)’를 추가하거나 표기 의무를 없앴다. 페이스북도 미주지역 거주자의 성별 구분란에 양성(bigender), 무성(agender) 등을 포함한 59개 옵션을 제시하고 있다.

 
가장 돈 잘버는 뷰티 유튜버는 남자

 

‘이태원 클라쓰’의 트랜스젠더 마현이(이주영). [사진 JTBC]

한국에서도 문화 현장에서는 ‘젠더 파괴’가 시작됐다. 평점 9.9의 웹툰을 드라마로 만든 JTBC의 ‘이태원 클라쓰’에는 트랜스젠더가 주요 캐릭터로 나온다. 지난해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캐릭터 ‘펭수’는 ‘남자도 여자도 아니’라고 선언했다.


 
요즘 가장 핫한 인물로 떠오른 양준일의 경우, 팬미팅에 참석한 한 주부는 “‘슈가맨’에서 보여준 실루엣 라인이 너무 예뻐서 팬이 됐다”고 털어놓았다. ‘아재’답지 않은 날렵한 외모와 패션, ‘꼰대’스럽지 않은 자상함, 젠체하지 않고 치부를 털어놓는 진솔함 등 ‘50대 한국남자’라는 젠더 전형성을 파괴하는 존재가 바로 양준일인 것이다.

 
세계적으로 ‘젠더 파괴’는 패션·뷰티 업계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여성의 전유물로 여겼던 뷰티 유튜버의 세계에서 ‘원톱’은 남자다. 지난해 포브스가 발표한 유튜버 수입 랭킹 5위에 오른 제프리 스타(Jeffree Star)는 구독자 1750만명을 보유한 미국의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자신의 화장품 브랜드를 론칭해 연매출 200억원을 올리며 뷰티업계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명품 패션 브랜드가 내세우는 트렌드도 ‘젠더 뉴트럴’이다. 2013년부터 젠더 불평등 해소 캠페인을 벌여온 구찌는 지난해 FW컬렉션에서 아예 양성성을 내세웠다. ‘페르소나(고대 그리스 연극배우들이 썼던 가면)’를 테마로 삼아 패션쇼 초대장으로 그리스신화 속 양성의 존재인 헤르마프로디토스 마스크를 발송하고, 런웨이 모델들도 가면이나 마스크로 얼굴을 가려 남녀 구분이 모호한 양성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세상이라는 무대 위에서 우리가 나타내려는 가면을 선택하면 그 사람이 되는 것”이라는 한나 아렌트의 말처럼, ‘젠더 또한 하나의 가면일 뿐’이라는 컨셉트였다.

 
‘핑크=여성의 색’이라는 오랜 공식도 깨졌다. 핑크색 패션은 지난해 대유행하며 성별을 가리지 않았다. BTS는 지난해 ‘맵 오브 더 솔: 페르소나’라는 타이틀로 핑크컬러 앨범을 내고 뮤직비디오에 멤버 전원이 올핑크 패션으로 등장했다. 배우 주지훈·이동욱과 아이돌그룹 세븐틴 등 남자 연예인들도 앞다퉈 핑크 수트를 입었다. 최근 출범한 미래통합당 정치인들도 상징색으로 ‘해피핑크’를 내세웠다.

 
‘드랙(drag·과장된 화장과 옷차림, 행동으로 이성을 연기하는 사람)’ 아티스트도 새로운 문화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이태원 퀴어클럽의 서브컬처로 존재해 온 ‘드랙’은 영미권에선 이미 주류다. 미국의 드랙퀸 서바이벌 프로그램 ‘루폴의 드래그 레이스’가 대표적이다. 각종 오디션 프로그램을 패러디해 최고의 드랙퀸을 뽑는 리얼리티 쇼로, 2009년 성소수자를 위한 케이블 채널에서 시작됐지만 현재 시즌 11까지 에미상을 9차례 받았을 정도로 화제가 됐다. 진행자인 드랙퀸 루폴 안드레 찰스는 2017년 타임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꼽혔다. 1월부터 넷플릭스에서 루폴 주연의 드라마 ‘에이제이&퀸’이 방송 중이고, 지난주에는 최초로 ‘루폴의 드래그 레이스’ 내한공연도 열렸다.

 
특히 시즌 8의 톱3에 오른 한국계 드랙퀸 ‘김치’는 지난달 세계 최대의 광고 무대라 불리는 슈퍼볼 경기의 건강식품 광고에까지 등장했다. 미국 시청자만 1억명이 넘는 최대 스포츠 축제에 한국인이 광고 모델이 된 것은 2013년 가수 싸이 이후 처음인데, 올해 슈퍼볼 광고 50여개 브랜드 중 9개가 성소수자 모델을 내세웠다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드랙퀸은 한국 대중문화도 물들이고 있다. 인스타 팔로워 10만이 넘는 드랙퀸 아티스트 나나영롱킴과 그가 소속된 그룹 네온밀크는 컨버스, H&M 등 각종 패션 브랜드의 화보를 장식하고, 브라운 아이드 걸스의 ‘원더우먼’, 마마무의 ‘힙’ 뮤직비디오에도 등장했다.

 
트롯계에는 ‘남자반 여자반’ 컨셉트의 신인가수도 나왔다. 예능 프로그램 ‘미스터 트롯’에서 아수라 백작 분장을 하고 남진·장윤정의 듀엣곡 ‘당신이 좋아’를 혼자서 소화한 한이재다. 본선에는 탈락했지만 유튜브에서 ‘한이재’와 ‘한이숙’ 두 개의 자아로 활동하며 순식간에 5만 구독자를 모았다.

  
서브컬처 드랙퀸이 주류문화 아이콘으로

 

남성 뷰티 유튜버 제프리 스타. [사진 유튜브 제프리스타]

사실 ‘젠더 파괴’는 무대에서 시작됐다. 전통적으로 연극·뮤지컬에서 도발적인 젠더 이슈를 던지는 작품들이 인기를 끌었다. 코로나 사태에도 1주일 연장공연까지 성공한 연극 ‘조지아 맥브라이드의 전설’이 대표적이다. 지난해 15주년을 맞은 장수 뮤지컬 ‘헤드윅’ 역시 최근까지 공연됐고, ‘펀홈’ ‘제이미’ 등 뉴욕과 런던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젠더 관련 신작들도 잇따라 국내에 소개될 예정이다.

 
무대가 젠더 파괴에 앞서가는 이유가 있다. 전세계적으로 근대 이전에는 여자가 무대에 설 수 없었던 탓이다. 그리스비극과 셰익스피어, 중국의 경극, 일본의 가부끼와 노에도 여장남자가 있었다. 보수적인 젠더 관념 탓에 등장한 여장남자가 지금은 맥락이 뒤집혀 ‘젠더 이분법’이라는 전통적 사회규범에 대한 저항의 스토리텔링을 위해 무대에 서는 것이다.

 
그런데 ‘헤드윅’ ‘라카지’ ‘프리실라’ 등 앞선 작품들이 트렌스젠더를 주인공 삼아 그들의 애환을 토로했다면, 최근 작품들은 좀 더 진화했다. ‘조지아 맥브라이드의 전설’이나 8월 공연 예정인 ‘킹키부츠’는 젠더 파괴를 보는 일반인들의 인식 업그레이드에 관한 이야기다. 각자의 젠더가 무엇이건, 젠더에 대한 고정관념을 초월한 ‘페르소나’를 찾았을 때 성공과 행복을 얻는다는 것이 공통된 메시지다.

 
영화 ‘카모메식당’으로 유명한 일본의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도 최근작 ‘그들이 진심으로 엮을 때’(2017)에서 트렌스젠더를 바라보는 시선을 다뤘다. 오기가미 감독은 “정체성을 고민하는 영화는 만들고 싶지 않았다”면서 “20대 때 목격한 LA의 당당한 성소수자들이 10여 년이 흐른 지금은 주류사회에서 맹활약중인데, 일본의 성소수자는 예나 지금이나 숨죽이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영화를 만들게 됐다”고 했다. 지금은 ‘젠더 정체성’이 아니라 ‘젠더 이분법’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전문가들은 전세계적으로 ‘D&I(Diversity&Inclusion·다양성과 포용성)’가 정치경제적 이슈인 만큼, 문화다양성에 대한 토론과 교육적 노력이 활발해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연세대 인간행동연구소 조지선 박사는 “한국을 비롯한 동양 사회는 전통적으로 권위와 질서, 과거의 경험을 중시하는 문화적 토양 때문에 이질적인 집단이 일상을 침범할 때 불편함이라는 정서로 반응한다”면서 “지금은 아트나 패션, 뷰티 분야 진보적인 사람들의 행동을 ‘트렌디하다’며 흥미롭게 주시하고 있는 단계지만, 대중문화 속에서 소수자들의 긍정적인 이미지가 반복 노출되고 토론 기회가 많아진다면 일상에서도 젠더에 대한 포용력이 커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