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SUNDAY 편집국장 레터] "전염병과 싸우는 최고의 방법"

중앙일보

입력 2020.02.07 16:37

수정 2020.02.09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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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입니다.” (리외)  
“성실성이 대체 뭔가요.” (랑베르)
“내 직분을 완수하는 겁니다.” (리외)
 
독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중앙SUNDAY 편집국장 김종윤입니다. 소설의 한 대목을 따왔습니다.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입니다. 페스트가 돌아 봉쇄된 오랑시에 갇힌 신문기자 랑베르와 의사인 리외가 나누는 대화이지요. 오랑시에 취재차 들렀다가 갇힌 랑베르는 아내를 만나기 위해 오랑시를 탈출할 계획을 짭니다. 이 과정에서 전염병과 사투를 벌이는 리외를 만나 윤리, 헌신, 성실의 가치를 깨닫고 랑베르는 오랑시 탈출을 단념합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의 공포와 불안이 여전합니다. 한국에서도 환자 수가 계속 늘어납니다. 전염병이 확산할지, 사망자가 발생할지 근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위기 상황에서 ‘나’는,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런 질문에 위의 문장이 떠올랐습니다. 상식적인 말 같지만 내 잇속만 채우려는 이 사회의 일부 구성원들에게 과연 직분을 알고 있는지 묻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환자를 치료하고 있는 중국 후베이성 우한대학 부속 중난병원 의료진. [로이터=연합뉴스]

 
우선 내 마음속을 들여다봤습니다. 내 안에 있는 혐오 바이러스가 드러나 부끄러웠습니다. 지하철을 기다리는데 곁에 있던 두 여성이 중국어로 대화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고민이 됐습니다. 얼른 자리를 옮겨 옆 칸 자리로 갔습니다. 혐오를 혐오한다고 생각했지만, 무의식 속에 혐오를 품고 있었습니다. 가슴은 이성을 추구하는데 머리에서는 혐오 바이러스가 튀어나왔습니다.  
 
내 직분은 무엇인가요. 중국인 입국자를 예의 주시하되 근거 없는 혐오와 배척의 시선을 거두는 것 아니겠습니까. 신종코로나가 유행하면서 유럽 등에서는 아시아인에 대한 제노포비아가 퍼지고 있습니다. 내가 혐오의 감정을 가질수록 나 또한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신종코로나를 박멸하기 위해 강단 있게 맞서면서 동시에 인권 존중을 간과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정치인의 직분은 무엇입니까. 정적을 비판하고 공격하는 건 정치하는 이의 기본 개인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이러스의 습격은 국민의 안위가 걸린 문제입니다. 당연히 정부 여당에 완벽한 방역 대책 수립을 촉구하고, 국민의 생명을 지키라고 감시하는 건 야당 정치인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중국인의 입국을 막자거나, 입국한 중국인을 돌려보내라는 등의 주장을 펴는 정치인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시나요. 국민을 지키는 수호자라고 보십니까. 아니죠. 이들은 자신의 잇속만을 챙기려 혐오 바이러스를 배양하는 숙주가 아닐까요.    
 
정치인의 직분은 불안과 공포를 조장하는 게 아니라 해소하는 겁니다. 과잉 공포는 합리적 사고를 마비시킵니다. 질병을 이겨낼 시스템의 건강성을 확장하는 게 아니라 공동체를 무너뜨립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국내 첫 확진자인 중국여성의 격리해제 판정이 난 6일 인천시 동구 인천의료원 3층 회의실에서 환자가 쓴 감사편지를 의료진이 공개했다. [뉴시스]

 
지금 의료진과 방역 관계자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환자를 치료하고 전염병이 퍼지지 않도록 사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진천, 아산 주민은 우한 교포 등을 따뜻하게 맞았고 그들이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이름을 드러내지 않는 많은 이가 신종코로나의 퇴치를 위해 본분을 지키려 애씁니다.    
 
지금 필요한 건 협조와 포용, 그리고 연대입니다. 신종코로나에 감염됐다가 한국 의료진의 노력 끝에 완치된 중국 여성이 의료진에게 남긴 감사의 편지에는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앞으로 남은 생애 다른 사람을 돕는 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본분에 충실한 의료진이 지구촌에 틔운 희망의 싹입니다.   
 
카뮈의 『페스트』에서 한 문장을 더 소개합니다. ‘마치 사람들은 신음이 인간의 타고난 언어였던 것처럼 지나쳐 버리거나 그 옆에 그냥 살았다.’ 우리가 지구촌의 신음을 외면한다면 우리의 존엄은 어디에서 찾겠습니까. 카뮈는 ‘재앙 중에 배운 건 인간에게는 경멸해야 할 것보다 찬양해야 할 게 더 많다는 점'이라고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