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금도 소년
이세돌은 3남2녀의 막내다. 형제 모두 아마 5단 이상의 실력자다. 큰형 이상훈은 프로 기사고, 작은 누나는 ‘월간바둑’ 편집장이었다. 형제들은 어렸을 때부터 아마 5단 기력의 선친으로부터 바둑을 배웠다. 선친이 아침마다 사활 문제를 주고 밭에 나갔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이세돌의 고향 사랑은 남다르다. 바둑리그에 신안군이 ‘신안천일염’이라는 팀으로 참가한 것도 이세돌이라는 스타가 있어서였다. 이세돌이 선수로, 이세돌의 형 이상훈이 감독으로 신안천일염 팀을 이끌었다. 21일 그의 마지막 대국이 신안군 증도 엘도라도 리조트에서 열린 것도 이 때문이었다. 비금도에는 그만한 규모의 레저시설이 없다.
이세돌은 1983년 태어났다. 아홉 살에 서울로 바둑 유학을 왔다. 열두 살이 되던 1995년 프로기사가 됐고, 중학교 3학년 때 학교를 그만뒀다. 하여 그의 최종 학력은 중학교 중퇴다. 국제대회에 우승해 병역 특례 대상자였으나, 애초부터 현역 입영 대상자도 아니었다.
그는 요즘의 젊은 프로기사와 달리 술 담배를 잘한다. 대국 중에 수시로 들락거린 것도 담배를 피우기 위해서였다. 2016년 알파고와 대국할 때 포시즌스 호텔이 규정을 깨고 흡연실을 마련해준 일화는 유명하다.
바둑기사 이세돌
프로기사 이세돌의 기록은 의외로 독보적이지 않다. 이세돌보다 더 어린 나이에 입단한 프로기사가 네 명이나 있다. 조훈현·이창호·조혜연·최철한. 우승 기록은 조훈현과 이창호에 한참 못 미친다. 예전보다 대회가 줄은 탓도 있겠으나, 최연소 입단 기록도 이창호가 갖고 있다. 무엇보다 이세돌은 바둑 올림픽이라 불리는 응씨배 우승 기록이 없다.
하나 이세돌의 인기는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았다. 이세돌의 바둑은 치열한 싸움 바둑이다. 전신(戰神)이라 불렸던 조훈현의 바둑도 흥미진진했지만, 이세돌의 바둑은 차원이 달랐다. 이세돌의 바둑은 기상천외·상상초월·전무후무 같은 수사를 동반했다. 이세돌이 인공지능에 이길 수 있었던 건 이세돌의 창의성 덕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세돌은 인공지능의 출현 이후 바둑이 승부가 돼 버렸다고 한탄했다. 맞는 말이다. 바둑은 승부이기 전에 예(藝)이자 예(禮)이며, 도(度)이자 도(道)이다. 하나 이세돌이야말로 싸늘한 승부사였다. 시간 공격. 제한시간에 쫓기는 상대를 몰아붙였던 이세돌 특유의 전술이다. 기계를 상대로는 이 심리전을 구사하지 못했다.
이세돌이 기보 저작권 문제로 한국기원과 마찰을 빚었을 때, 나는 이세돌 같은 거장이라면 공동체를 조금 더 이해해주길 바랐었다. 개인적으로는 분명 억울하거나 부당한 부분이 있었을 테다. 하나 바둑은 상대가 있어야 성립한다. 바둑은 ‘나’라는 개인의 기록경기가 아니다. ‘너’와 마주 앉아야 성립하는 관계의 문제다. 말하자면 우리의 세계다.
최후의 1시간
이세돌은 인공지능을 놀랜 최후의 인간으로 남을 것이다. 요즘의 프로기사는 죄 인공지능으로 바둑을 공부하기 때문이다. 박정환·신진서 같은 현재 최고의 기사들은 인공지능을 이기기 힘들어 보인다. 그들은 시방 가장 인공지능 같은 바둑을 두는 기사다. 가장 기계 같은 바둑을 둬 다른 인간은 이길 수 있어도 기계를 이기기는 어렵다.
토요일 오후 이세돌의 마지막 승부를 지켜보며 울컥했다. 특히 막바지 1시간은 처절했다. 누가 봐도 크게 밀리는 형세였는데, 그는 좀처럼 돌을 거두지 않았다. 1분 초읽기를 수십 번 써가며 그는 인공지능이 제한시간 2시간을 거의 다 쓰게 할 정도로 괴롭혔다. 방송을 돌려 보니 이세돌은 55분이나 초읽기를 끌고 갔다. 그 55분 동안 그는 쉼 없이 싸움을 걸었고 끊임없이 부딪쳤다. 싸움마다 판판이 깨지는 데도 다시 일어나 달려들었다. 덩치 큰 형에게 두들겨 맞고 코피가 터졌는데도 악에 받쳐 덤비는 꼬마 같았다. 차마 안쓰러워 더는 못 보겠다 싶을 즈음, 이세돌은 겸연쩍은 손짓을 하며 항복을 선언했다.
어쩌면 기계처럼 차가운 승부를 펼쳤던 이세돌은 마지막 승부에서 비로소 인간으로 돌아왔다. 낭만의 시대는, 하여 인간의 시대는 비금도 소년의 퇴장과 함께 저물고 있었다. 『노인과 바다』의 그 노인, 산티아고를 본 것도 같았다.
레저팀장 ploveso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