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손학규, 박원순, 김무성, 황교안.
긴 수염, 등산복…‘럼버섹슈얼’의 재현
머리카락과 수염뿐이 아니다. 황 대표는 국회 농성을 이어가며 한동안 패딩 점퍼와 운동화 차림을 했다. 국회 화장실에서 씻고, 밥과 김치 등 최소한의 식단으로 구성된 이른바 ‘투쟁식(食)’을 먹는다고 한다. 말 그대로 전천후 ‘의식주 투쟁’이다.
깎지 않은 수염과 등산복·운동화는 수년 전 미국에서 유행한 ‘럼버섹슈얼(lumber sexual)’ 스타일의 전형이다. 럼버섹슈얼은 ‘나무꾼(lumberjack)’과 ‘메트로섹슈얼(metrosexual)’의 합성어로, 투박한 남성미를 강조하는 스타일을 일컫는 패션 용어다. 우리말로 ‘나무꾼 패션’ 정도로 해석된다. 앞서 고비나 위기를 맞은 정치인들이 종종 수염을 기르고 허름한 옷을 입어 ‘정치인의 럼버섹슈얼’ 공식이 생겼다.
중진의 고뇌 표현
문 대통령은 그해 1월 더불어민주당 대표직에서 물러난 뒤, 20대 총선에 불출마해 ‘야인’ 신분으로 네팔·부탄에 갔다. 등산복을 입은 그의 얼굴에 구레나룻과 턱수염이 길게 자라 있었다. 상대편에서 총선 참패의 책임을 지고 사퇴한 김무성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 대표도 당시 ‘민생 대장정’을 떠나 전국을 돌면서 얼굴 절반이 수염에 뒤덮였다. 투박한 격자무늬 셔츠 차림으로다.
사실 정치권의 럼버섹슈얼의 원형은 이전에도 많았다. 2006년 ‘100일 민심 대장정’을 걸었던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가 럼버섹슈얼의 정석을 보여줬다고 평가받는다. 이듬해(2007년) 대선을 앞두고 93개 직업을 체험했는데, 수염을 기른 채 탄광에 선 사진, 큰 풀뿌리를 씹어먹는 사진 등이 13년이 지난 지금도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 회자된다.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한 박원순 시장도 49일간의 백두대간 종주를 마치고 털북숭이가 돼 대중 앞에 나타났다.
황교안의 럼버섹슈얼에 없는 것
정치권에서는 황 대표가 이미지 변신에 성공한 것으로 평가한다. “(옆머리를 짧게 친) ‘투 블록’ 헤어스타일과 수염이 어우러져 야성(野性)을 풍긴다”는 평이 나온다. 전직 공안검사-장관-국무총리 출신이 가진 ‘반듯한 모범생’ 모습을 벗어던졌다. 럼버섹슈얼 효과일 수 있다.
그런데 실질적 투쟁 성과가 물음표다. 선거법·공수처법은 상정을 앞두고 있고 지지율이 제자리걸음이다. 20일 여론조사기관 한국갤럽은 한국당 지지율이 23%라고 발표했다.이달 17일~19일 전국 성인 1002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다(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고). 조국 사태 때 반짝 30% 선을 바라보다 다시 떨어져 민주당(37%)과 14%포인트 차이가 났다. 검찰 수사와 부동산 대책에 대한 반발 등 여권의 악재가 계속되고 있지만 야당을 향한 기대로 이어지지 않은지 오래다. 당내에서도 "큰 일"(충청 지역의 한 의원)이라는 걱정이 많지만 "협상 모드로 돌아오기엔 너무 멀리 갔다"(익명을 원한 정치학 교수)는 진단이 나온다.
그간 정치인의 럼버섹슈얼은 히말라야(문재인)와 백두대간(박원순)에서, 또는 전국을 누비며(김무성·손학규) 실현됐다. 광화문과 여의도에서 수염을 기르고 나무꾼 복장을 해 민심을 얻은 사례가 없었다. 윤소하 정의당 원내대표는 지난 12일 황 대표를 향해 “수십 년 농성투쟁을 해왔던 당사자로서 청와대에 갔다가, 국회 앞에 왔다가, 다시 국회 로텐더홀로 옮겨 가는 것은 정상적인 농성이 아님을 가르쳐드린다”고 말했다.
황 대표는 최근 ‘노 타이’ 양복과 코트 패션으로 복귀했다. 20일 정장 수트에 구두 차림으로 시·도당위원장 회의를 주재했다. 수염만 그대로 뒀다.
심새롬 기자 saerom@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