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한병철은 이 시대 대표적 병원(病原)을 ‘긍정성의 과잉’에서 찾았다. ‘성과사회’로 표현되는 후기 근대사회의 인간들은 개성과 자아, ‘나는 할 수 있다’는 긍정성으로 자신을 무장한다. 한나 아렌트는 근대사회의 인간형을 개성과 자아를 버리고 규율에 순응하는 ‘노동하는 동물’로 표현했지만, 실제 인간은 결코 그런 익명의 삶에 용해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청년 다섯 중 한 명꼴로 니트족
기계노동 시대적 요인도 한몫해
근대적 ‘노력신화’론 해결 안 돼
새 시대 인간 가치 다시 찾아야
최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한국 청년보고서 (Investing in Youth: Korea)를 내놨다. 언론도 크게 주목하진 않았다. ‘청년고용률 43%’처럼 지난해 통계로 작성돼 별로 신선하지 않아서였을 거다. 어쩌면 이미 청년 고용불안 같은 문제는 만성화돼 대수롭지 않은 뉴스가 됐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국내 청년 니트(NEET, 18.4%) 비율이 OECD 회원국 평균(13.4%)보다 높고, 대졸 이상 고학력자가 이 중 45%로 OECD 평균(18%)보다 2.5배나 높다는 대목엔 또 눈길이 갔다.
니트(NEET). 학교든 일터든 어디에도 소속돼 있지 않고, 구직활동도 하지 않는 청년들. 시쳇말로 ‘청년백수’다. 일본의 장기불황기에 나왔던 이 용어는 어느새 우리나라에 정착했다. 일본에선 그 여파로 집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 젊은이들,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가 양산됐다. 요즘엔 50대 장년이 된 이들이 80대 부모의 고령연금에 의존해 사는 ‘8050’이 사회문제가 됐단다. 일본 사회에선 이제야 ‘그 당시 어려웠지만 히키코모리를 방치해선 안 됐었다’는 반성론이 나온다. 지금 한국이 바로 일본의 ‘그 당시’ 반성의 시점에 서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시점을 제대로 살아내고 있는가.
우리는 안다. 지금 니트는 불평등 문제라는 것. 청년정책의 개별적 성공사례는 나오겠지만 대세를 바꾸진 못할 거다. 부모의 재력과 신분의 대물림은 계속될 것이고, 불운하고 빈곤한 청년들이 노력만으로 중산층에 진입하는 일은 기적의 확률만큼 일어날 것이며, 열악한 고용률 통계도 굳건할 것이다.
또 지금 니트는 시대적 문제다. 기계가 노동하는 시대. 사람 일자리가 확 주는 건 상상이 아닌 보이는 미래다. 이미 우리는 대부분 잠재적 실업자다. 임금노동으로 생활했던 근대인의 시대는 저물고 있다. 그런데 청년들에게 좁디좁은 임금노동시장 참여를 부추기는 건 온당한 일일까.
잘 알려진 미래 시나리오가 있다. 사람은 생산이 아닌 소비의 주체로 국가가 제공하는 ‘기본소득’으로 소비하며 삶을 영위하는 사회. 국가 경제정책은 기계노동의 부가가치를 세금으로 환수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기본소득 재원을 마련해 소비를 증진하는 것이다. ‘정부의 일’도, ‘사람의 일’도 바뀔 거다.
사람의 일. 고대 그리스의 시민사회를 생각한다. 노예가 노동하고, 시민들은 광장에 모여 철학을 논하던 시대. 그 시대 인간의 가치는 노동의 가치로 환산되지 않았고, 시민들의 여가가 철학의 기반을 닦았다. 인간의 가치는 노동생산성만으로 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노동가치가 충만한 이 시대 사람들은 ‘피로’를 창조했고, 더 행복하지도 않다.
인간은 기본적 욕구가 충족돼야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존재다. 존 버튼은 『기본욕구이론』에서 사람은 안전과 정체성, 자기결정권과 대외적 인정이라는 욕구가 반드시 충족돼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미래를 살 현재 청년들에게 근대인의 가치를 강요하고, 노동시장에서 탈락하면 패배자인 양 바라보는 건 그들의 기본욕구 자체를 흔들어버려 ‘패배자의식’을 심어주고 스스로를 고립시키게 할 수 있다. 미래엔 우리가 살아온 근대인의 방식이 틀릴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생각을 바꿔야 한다. 여가가 넘치는 새 시대에 변화할 인간과 삶의 가치를 연구하고, 이를 준비시키는 쪽으로 청년정책을 이동해야 한다. 우리 니트 청년들의 미래 모습이 현재 일본의 장년층 히키코모리 같아져서는 안 된다.
양선희 대기자/중앙콘텐트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