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비가 죽고 4년 뒤 제갈량이 전격 개시한 제1차 북벌(北伐)은 기습에 가까웠습니다. 유비가 죽은 뒤 ‘촉한(蜀漢)은 걱정할 것 없다’고 마음을 놓았던 위나라의 허를 찌른 대규모 공세였습니다.
제갈량의 준비는 치밀했습니다. 질서정연한 촉한의 군사가 한중을 넘어 진격하자 위(魏)나라와 촉나라의 국경지대에 있던 남안ㆍ천수ㆍ안정 등 3개 군에서 동시에 제갈량에 호응했고, 장안을 비롯한 위나라 서쪽 변경은 발칵 뒤집혔습니다. 사서는 ‘위나라의 조야가 모두 두려워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성운의 역사정치]
산꼭대기에 진을 친 마속은 장합의 포위에 대패했고, 북벌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제갈량은 눈물을 흘리며 마속의 목을 베어 엄정한 군율을 지켰습니다. 여기까지가 대략적인 ‘읍참마속’의 배경입니다. 『삼국지연의』가 비록 역사에 많은 허구를 뒤섞긴 했지만 적어도 읍참마속 만큼은 실제 역사와 별 차이가 없습니다.
마속의 죽음에 대한 논란
마속의 처형에 대한 논란은 이미 당대부터 있었습니다.
삼국시대에서 약 한 세기가 지난 동진(東晉)시대 습착지가 정리한 『양양기(襄陽記)에 따르면 마속의 처형이 전해지자 촉한의 고위 관료였던 장완은 제갈량을 찾아가 “지금 천하는 아직 안정되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귀히 여기고 써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럴 때 이런 걸출한 인재를 죽였으니 너무나 애석합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제갈량의 측근이었던 장완의 말 속엔 완곡한 원망도 느껴집니다.
습착치 역시 “촉한은 원래 약소하고 인재도 드물다. 그런데 뜻밖에 그런 준걸을 죽였다. 이처럼 사람을 쓰면서도 대업을 이루려 생각하는 것은 상당히 곤란한 일이 아니겠는가”라고 제갈량의 처사를 비판했습니다.
마속이 있었다면 달랐을까요.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백미의 동생, 제갈량의 뒤를 이을 인재
삼국지에서 나온 또 다른 유명한 단어, ‘백미(白眉)’는 촉한의 인재였던 마씨 5형제 중 맏이 마량의 흰 눈썹에서 비롯됐습니다. 사람들은 마씨 5형제를 칭찬하면서 그중에서도 마량이 가장 우수하다며 백미라고 불렀죠.
AD 225년 북벌을 앞두고 남만 정벌에 나선 제갈량에게 마속은 “마음을 공격하는 것이 상책이고 성을 공격하는 것은 하책이다. 심리전을 하는 것이 상책이고 군대로 싸우는 것은 하책이다”라는 이른바 ‘16자 계책’(攻心爲上 攻城爲下 心戰爲上 兵戰爲下)을 전합니다. 제갈량이 맹획을 7번 사로잡고 7번 풀어줬다는 ‘칠종칠금(七縱七擒)’ 일화를 생각하면 두 사람은 생각이 비슷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자 관계처럼 묘사했지만, 제갈량이 불과 7살 위였기 때문에 실제로는 예의를 지키는 형-동생 같은 사이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러한 이들의 특수 관계에는 능력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지역적 연고도 강력하게 작용했습니다.
촉한의 정치상황과 제갈량의 입지
당시 촉한을 둘러싼 정치적 상황이 다소 복잡했습니다. 촉한은 크게 3개 그룹으로 구성된 사회였습니다.
①유비 그룹 (도원결의부터 입촉 전까지 합류한 그룹. 제갈량ㆍ관우ㆍ장비ㆍ조운 등)
②유장 그룹 (유장 정권에서 일한 익주의 구(舊) 주류. 법정ㆍ이엄ㆍ동윤 등)
③익주 그룹 (익주의 토호-명사 세력. 장익ㆍ마충ㆍ초주 등)
조조를 피해 형주를 다스리던 유표에게 의탁했던 유비는 적벽대전 전까지 형주의 유력 인사들과 교우하며 자신의 세력으로 만들었는데 제갈량과 마씨 5형제가 바로 이때 참여했습니다. 제갈량의 맞수로 꼽힌 방통도 그렇습니다. 그 외에도 황충, 위연, 장완, 요화, 이엄, 등지, 비의, 양의 등 촉한 정권에서 중용된 주요 인재 다수가 형주 출신이었습니다.
이들 형주 출신 다수가 제갈량의 발탁과 후원을 받아 정계에서 중책을 맡았고, 제갈량 시대의 주류를 형성했습니다. 요컨대 제갈량은 형주파의 좌장이었던 셈이죠.
토박이인 익주 그룹은 유장에 이어 유비라는 외부 세력에 정권을 내준 꼴이었고, 직전까지 익주를 다스린 유장 그룹도 익주 그룹과 유비 그룹 사이에서 애매한 처지가 됐습니다.
북벌은 촉한의 패망을 앞당겼나
북벌이 촉한의 국력을 소모해 패망을 앞당겼다는 평가도 있지만, 당시 상황이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위나라가 자리 잡은 중원은 본래 정치, 경제의 핵심이긴 했지만, 황건적의 난을 시작으로 동탁, 원소, 여포, 조조, 원술이 벌인 전쟁과 약탈의 주 무대였기 때문에 생산력이 많이 쇠퇴한 상태였습니다.
반면 중원에서 멀리 떨어진 익주는 오랜 기간 대규모 전란의 참화에서 떨어져 있었기에 피해가 적었습니다. ‘기초 체력’이 촉나라를 압도하는 위나라를 상대로 시간만 끈다면 그 차이는 점점 벌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히려 회복되기 전에 위나라를 치는 편이 나을 수도 있었습니다.
또 촉한의 복잡한 갈등을 고려해보면 북벌은 내부 갈등을 봉합할 수 있는 강력한 정치 어젠다였습니다. 끊임없는 북벌 시도를 통해 외전으로 내전을 막는 방법이죠. “촉한의 남녀 인구는 94만, 무장한 병사는 10만 2000명이었다”는 『삼국지』「후주전」의 기록을 보면 촉한은 병영 국가에 가까운 구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촉의 특산품인 비단 생산에 힘을 기울였고 금광과 은광을 개발하고, 전방 지역에선 둔전(屯田)을 시행해 군량 자급에 힘썼습니다. 그래도 위나라와의 수십 년에 걸친 전쟁을 감당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비(非)익주인으로 구성된 촉한 지도층은 익주의 토지, 인구, 물자를 기반에 기댈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익주 토박이들의 불만은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으로 잠복해 있었습니다.
인사참사의 책임을 진 제갈량
읍참마속은 이런 배경 속에서 일어났습니다. 마속의 발탁은 제갈량의 고집이 빚어낸 결과였습니다. 여론이 생각하는 선봉장의 유력 후보는 유비가 총애했던 명장 위연과 황제의 인척인 오의였습니다.
되려 마속은 유비가 생전에 “신뢰하기 어렵다”고 깎아내린 데다 별다른 공적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촉한의 최고 권력자인 제갈량은 여론을 누르고 형주파의 막내이자 신진 리더로 촉망받던 마속을 전격 기용했습니다.
제갈량은 마속의 목을 벨 수밖에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종군했던 백전노장 조운은 강등됐으며, 황습은 병권을 빼앗겼고 제갈량 자신도 3계급을 강등시켜 우장군으로 끌어내려 촉한 사회에 사죄했습니다.
다만 마속의 전략에 줄기차게 반대하고, 다른 곳에 진영을 쳤던 왕평은 승진을 시켰습니다. 일부 전력을 보호한 그는 가정 전투에서 위나라의 추격을 결사적으로 막아 나머지 군대가 후퇴할 시간을 벌어줬습니다.
마속이 죽을 때 “그를 위해 통곡한 사람이 십만명이 넘었다”고 사서는 전합니다. 마속을 죽여야만 했냐는 장완의 원망 어린 질문에 제갈량은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해명했습니다.
“천하가 무너져 갈라지고 전쟁이 끝도 없는데 법을 엄격히 집행하지 않으면 우리가 어떻게 적을 이기겠느냐.”
실제로 훗날 제갈량이 사망한 뒤 북벌의 유지를 이어간 것은 형주파가 아니라 위나라에서 투항한 양주(천수) 출신의 강유였습니다. 촉한에서 형주파의 시대가 저물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랬기 때문에 제갈량의 조치는 효력을 발휘했습니다. 여론은 가라앉았고 유장 그룹과 익주 그룹도 입을 다물었습니다. 또 제갈량은 정국 주도권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다시 2ㆍ3ㆍ4차에 걸친 북벌이 재개될 수 있었습니다.
'읍참마속' 없는 文과 黃
조국 사태를 복기해보면 문재인 대통령에게도 ‘읍참마속’의 기회가 몇 차례 있지 않았을까요.
조 전 장관을 둘러싼 분위기가 심각해져도 청와대에서 반응이 없자 여권 일각에선 부산-친문-후계자 등의 상징성을 가진 조국 전 장관을 내치기 어렵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정치적 상처를 입히는 것은 곤란하니, 오히려 ‘검찰 개혁’이라는 공을 쌓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이죠.
하지만 문 대통령은 인사 책임을 인정하기보다는 ‘정치 공방’의 탓으로 돌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도 다르지 않습니다. 박찬주 전 대장 영입에 직접 팔을 걷어붙였던 황 대표는 그를 둘러싼 논란이 증폭하는데도 책임 있는 행동을 보이지 않고 한 발짝 물러섰습니다. 이런 여파로 조국 정국에서 얻은 지지율은 다시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신은 불행히도 평범한 재능을 갖고 맡지 말아야 할 중요한 임무를 맡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마음과 조심하고 삼가는 마음을 갖지 못했습니다. 이 때문에 가정(街亭)에서 장군들이 소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지금 그 원인을 밝히자면 제가 사람을 잘못 기용했기 때문입니다. 전쟁에서 패하면 반드시 최고 책임자를 문책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신은 마땅히 모든 책임을 져야 합니다. 따라서 3등급 강등을 청합니다. 부디 허락해 주십시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이 기사는 와타나베 요시히로 『삼국지의 정치와 사상』, 왕링옌 『역사 속 경제 이야기』, 이중톈 『삼국지 강의』를 참고해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