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유성운의 역사정치] "병자호란보다 무섭다" 조선 경제 거덜 낼뻔한 소 전염병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김홍도 '외겨리' [자료=국립중앙박물관]

김홍도 '외겨리' [자료=국립중앙박물관]

“6월 1일, 아랫마을에 소 역병이 생겼는데, 말로 다할 수 없다. 6월 8일, 역병이 크게 기승을 부려 소를 가진 사람들이 모두 피하여 나가서 사람이 밭을 갈았다. 열 사람이 소 한 마리의 힘을 감당할 수 없었다. 7월 22일, 소 역병이 번져 온 나라가 모두 그러한데, 원근에 있는 소들은 이미 다 역병에 걸렸다고 한다. 다행히 역병에 걸리지 않은 소들은 먼저 농가에서 스스로 도살하여 최근에 소를 죽이는 일이 성행했다. 이 또한 변괴다. 하도와 우도에는 소 한 마리도 남은 것이 없고, 영천(영주)과 안동 역시 그러하니, 내년에 농사지을 일이 몹시 염려된다.”

[유성운의 역사정치]

1637년 여름 경북 안동의 선비 김령은 영남 일대를 뒤덮은 우역(牛疫)을 바라보며 일기『계암일록』에 꼼꼼히 기록했습니다. 약 1년 전 평안도에서 시작된 우역이 급기야 소백산맥을 넘어 조선 전역으로 퍼지자 조선 조정은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특히 병자호란(1636년 12월~1637년 1월)을 막 끝낸 인조와 서인 정권으로선 자칫 정권의 존망조차 위태로워질 수 있었던 만큼 이를 극복하기 위해 필사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동아시아 국제전이 전염병을 확산시키다

외화 '정복자 코르테즈' [중앙포토]

외화 '정복자 코르테즈' [중앙포토]

제러미 다이아몬드는『총, 균, 쇠』에서 역사의 향방을 결정짓는 요소 중 하나로 균(菌)을 꼽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1521년 코르테스가 수 백명에 불과한 전투병을 이끌고 아스테카 제국을 정복할 수 있었던 요인을 천연두라고 설명하죠. 애초 코르테스가 의도했던 것은 아니지만 수 천년간 격리됐던 양 세력이 접촉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비록 구세계와 신세계의 만남처럼 극적이진 않았지만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전반까지 조선과 만주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전개됐습니다. 반세기 동안 벌어진 임진왜란(1592~1598년), 정묘호란(1627), 병자호란(1636~1637)을 통해 조선ㆍ명(중원)ㆍ후금(만주)ㆍ일본이 뒤엉켜 유례없는 국제전을 치렀습니다. 그러면서 대규모의 군사와 가축이 이동했고 이 전선(戰線)을 따라 전염병 병원체들도 함께 이동했습니다.

특히 만주 일대는 전염병이 들끓을 요인들이 많았습니다. 첫째 여진족인 후금이 만주에서 세력을 키우면서 대규모 개간이 진행됐고 개간된 경작지에는 농장을 설치해 명, 몽골, 조선에서 노획한 포로와 가축이 집단으로 거주하게 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다양한 병원체들이 접촉하면서 전염병이 생겨날 가능성이 커졌습니다.

김훈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남한산성'(황동혁 감독)의 한 장면. [사진 CJ E&M]

김훈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남한산성'(황동혁 감독)의 한 장면. [사진 CJ E&M]

둘째 후금(청)이 몽골에 대한 수차례 원정을 벌이면서 중앙아시아와 활발히 접촉하던 몽골을 통해 다양한 병원체를 함께 갖고 돌아왔습니다.

병자호란 후 심양으로 끌려갔던 소현세자가 남긴 『심양일기(瀋陽日記)』에도 이런 정황이 나타납니다. 소현세자는 1637년에 심양에 가서 7년 만에 돌아오는데 이 기간에 16차례에 걸쳐 전염병이 발생했다고 기록했습니다.

17세기 조선을 뒤덮은 우역의 시작은 정묘호란이 발발하고 5개월이 지난 1627년(인조 4년) 10월입니다. 당시엔 인지하지 못했지만, 압록강을 넘어온 후금 군사와 가축에 의해 전염됐을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이후 더 큰 규모로 닥친 1637년(인조 15년)의 우역도 병자호란 전후라는 점에서 후금 군사들에 의해 확산됐다는 것이 학계의 견해입니다. 조선에서는 1636년 8월 평안도에서 처음 발생한 것으로 보고됐지만 이미 3개월 전 후금의 본거지인 심양 일대에서 우역이 시작됐기 때문입니다. 조선 중기 무인 조경남(1570~1641)은 『속잡록』이라는 책에서 병자호란에서 후금(청) 군대의 이동 경로와 우역의 확산 경로가 일치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열 마을에 한 마리의 소가 없다.” 

단원 김홍도의 '노상 파안 (路上 破顔)' [자료=국립중앙박물관]

단원 김홍도의 '노상 파안 (路上 破顔)' [자료=국립중앙박물관]

지금은 서울에서 부산으로 이어지는 경부고속도로가 가장 중요한 도로로 꼽히지만 조선 시대만 해도 한양에서 평양(황해도)을 거쳐 의주(평안북도)까지 이어지는 서로(西路)가 가장 중요한 도로였습니다. 이 도로를 통해 개성과 의주 상인들이 중국과 무역을 했고, 외교 사신들도 오갔습니다. 한편으로는 대륙에서 쳐들어오는 군용도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 만큼 우역의 주요 타깃이 됐습니다.

가장 피해가 막심했던 평안도는 “우역(牛疫)이 크게 번져 살아남은 소가 한 마리도 없다”(『인조실록』 14년 8월 15일)고 했고, 한 달 뒤엔 한양까지 퍼졌습니다. “우역(牛疫)이 서쪽에서 남쪽으로 번지고 한양에도 죽는 소가 줄을 이었다.”(『인조실록』 14년 9월 21일)

이듬해인 1637년엔 위에서 언급한 김령이 한탄했듯이 삼남(충청ㆍ전라ㆍ경상) 일대까지 확산해 “삼남에 우역이 크게 번져 남은 종자가 거의 없어질 정도”(『야언기략』)였고 최명길은 인조에게 “소 역병의 재앙이 매우 혹독하니, 하늘의 뜻이 백성의 목숨을 끊으려는 듯합니다” (『인조실록』 15년 8월 29일)고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승정원일기』에는 “우역이 크게 번져, 한 마을 (소가) 한두 마리도 없다”,  “(임진왜란ㆍ병자호란 같은) 병란의 피해보다 심하다”, “만고(萬古)에 없었던 우역” 등 당황해하는 조정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조선시대 소고기를 불에 굽고 있는 사대부들을 그린 김홍도의 그림 [중앙포토]

조선시대 소고기를 불에 굽고 있는 사대부들을 그린 김홍도의 그림 [중앙포토]

베 10~20필 수준이던 소 한 마리의 가격은 이해 11월 말이 되면 40~50필에 달할 정도로 폭등했고, 그마저도 구하기가 쉽지 않아 심지어 국가 제사에도 소고기를 마련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양사가 제향(祭享)에 말린 꿩으로 중포(中脯·제사에 쓰는 포)를 대신하자고 계청하여 상이 대신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였었는데, 최명길이 아뢰기를, ‘꿩으로 소를 대신하는 것은 미안한 일이 될 듯하니 노루·사슴·돼지 세 가지를 그때그때 있는 대로 취하여 중포를 만들어 쓰자’ 청하자, 상께서 ‘돼지포를 쓰기는 미안하다’ 하여 노루와 사슴만을 쓰게 하였습니다.”(『인조실록』 16년 5월 7일)

왕실이 이런 상황이니 민간은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혼례에도 소고기 대신 닭이나 꿩고기, 아니면 생선 등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유성운의 역사정치]

조선의 필사적 대응 ① 

소가 사라지는 것은 단순히 먹거리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소는 식량으로써 단백질 공급원이기도 했지만 가장 중요한 농기구이자 비료 수단이기도 했습니다. 소를 이용해 밭을 갈았고, 소의 똥은 거름으로 유용했습니다. 우역 때문에 소가 떼죽음을 당하자 당장 농업에 차질을 빚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국가 산업이 멈출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우부승지) 이경증이 말하기를 ‘우역이 크게 번져 한 마을에 (소가) 1~2마리도 없습니다. 이것은 매우 상서롭지 않은 것이니 사람의 힘으로 그것을 갈면 앞에서 5~6명이 끌고 뒤에서 한 사람이 밀어 소의 힘을 대신할 수야 있지만 다만 먹을 것만 없어질 것이 걱정입니다.’ 국왕이 말하기를 ‘사람이 모두 땅을 디뎌 어찌 깊이 갈 수 있겠는가.’ 경증이 말하기를 ‘충청도는 봄보리를 심은 곳이 많다고 하지만 경기도는 한 마을에서 한 두 곳도 갈지 못했다고 합니다. 우역의 재앙은 8도가 다 같아서 가을갈이를 못 하였으니 봄 농사를 알 만합니다. 혹 사람이 대신 갈더라도 남은 힘이 이미 다하였고 철이 이미 늦었으니 논밭을 갈아 일군 것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올해는 여물더라도 앞으로 이어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인조 15년 4월 27일)

김홍도 '밭갈이' [중앙포토]

김홍도 '밭갈이' [중앙포토]

우역에 맞선 조정은 일단 전국 각지에 소의 도살을 엄금하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피해지역의 소나 돼지를 몰살시키는 지금의 방법과는 다르죠. 현재의 병리학 개념으로 보면 이해가 가지 않지만, 당시 조선은 도살을 허가할 경우 소의 종자 자체가 끊어질 것을 우려했습니다. 우역에 쓰러지기 전에 먼저 잡아먹는 게 낫다는 생각에 전국 각지에서 도살이 횡행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역이 발생하면 일시적으로 소값이 폭락했다가 다시 치솟곤 했습니다.

결국 조정은 우역에 감염되지 않은 제주도에서 소를 가져오기로 했습니다. 당시 제주도엔 약 2만1000마리가량의 소를 키우고 있었는데 조선 조정은 1637년 하반기에 제주도에서 소를 가져와 경기도의 각 군현에 100마리씩 나눠줬습니다. 제주도가 우역 청정지대였던 것은 바다로 격리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이듬해까지 살아남은 것은 3분의 1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1637년 겨울이 되면 이마저도 어려워집니다. 우역이 제주도까지 확산했기 때문입니다. 제주목사의 보고에 따르면 키우던 2만1000마리의 절반가량이 폐사했습니다.

서귀포시축협 생축사업장에서 길러지는 제주흑우들. 이수기 기자

서귀포시축협 생축사업장에서 길러지는 제주흑우들. 이수기 기자

조선의 필사적 대응 ②

임진왜란 후 조선 조정은 일본과 교역하는 것을 꺼렸습니다. 다만 대마도의 줄기찬 요청이 이어지고, 나름 성의를 보이자 못 이기는 척하고 부산에 왜관을 열어 제한적인 교역을 허가했죠. 하지만 이때는 조선이 먼저 손을 내밀기로 합니다. 더는 체면이나 명분을 따질 겨를이 아니었던 것이죠. 비변사의 요청을 왕이 수락하면서 조정에선 일본 대마도를 통해 일본 소를 도입하기로 결정합니다.

“대마도에는 소가 매우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값이 몇 냥의 은자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본국의 사정을 알려 거듭 소를 무역하겠다고 하면 대마도주는 반드시 마음을 다할 것입니다. 대마도의 소가 부족하면 널리 이웃 섬에서 무역하여 부응할 것입니다.”(『왜인구청등록』 인조 15년 8월 10일)

지난달 31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조선통신사기록물’ 중 1783년 변박이 초량왜관을 그린 ‘왜관도’. [연합뉴스]

지난달 31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조선통신사기록물’ 중 1783년 변박이 초량왜관을 그린 ‘왜관도’. [연합뉴스]

하지만 이듬해 5월부터 일본 나가토국(지금의 야마구치현)에서 우역이 시작되면서 이마저도 틀어집니다. 이 우역은 일본 관서지역 전체에 퍼지면서 막대한 피해를 입혔는데 연구자들은 아마도 부산-대마도-일본을 통한 무역 루트를 통해 우역이 전달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시기는 제주도가 우역에 감염된 1637년 겨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결국 조선은 당시 우역의 청정지대였던 몽골로 눈을 돌립니다. 최명길이 사은사로 떠나 청나라의 허가를 받은 조선은 몽골로 소 매매 교섭단을 보냅니다. 우역 전 한양에서 소 한 마리의 가격은 면포 10필(은 10냥) 전후였고, 우역 때는 30~40냥을 웃돌았습니다. 역시 우역으로 큰 피해를 입은 만주의 심양도 은 30냥 정도였는데, 몽골은 20냥 이래였다고 합니다. 당시 조선은 사절단에게 약 1900냥가량을 줬으니 90~95마리 정도를 기대한 셈입니다.

카라코룸의 푸른 대평원에서 양떼를 몰고 있는 몽골 유목민. [중앙포토]

카라코룸의 푸른 대평원에서 양떼를 몰고 있는 몽골 유목민. [중앙포토]

성익을 대표로 하는 사절단은 1638년 2월 11일 떠나 5월 24일 한양에 당도했는데, 그들이 가져온 소는 기대치보다 두 배 많은 185마리였습니다. 우역의 피해로부터 멀리 떨어진 몽골의 가장 깊숙한 내륙지대까지 들어가 은 10냥 전후로 거래했다고 하니 정말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던 것 같습니다.
역사책에서 크게 다뤄지지 않은 ‘소 사절단’의 활약은 조선 역사에서 손에 꼽힐만한 무역 거래라고 생각되는데 30년 후 영의정 정태화의 회고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병자년부터 정축년까지 죽은 소가 수도 없어 남아있는 종자가 거의 없었으므로 국가에서 성익을 시켜 몽골 땅에서 사 왔습니다. 지금 있는 소들은 모두 그 종자입니다.”(『현종개수실록』 4년 8월 戊申)

당시 소의 증식률이 30% 정도였다고 하는데 185마리의 소가 모두 살아남았다는 전제를 한다면 1663년 당시엔 1만420마리로 늘어나 있었을 것입니다.

심지어 “정축년 난리가 있은 뒤로… 소가 많이 번식되고 나서 지금은 오히려 민간에 큰 폐단이 되고 있습니다.”(『현종개수실록』 1년 8월 17일) 라는 기록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이 무렵엔 완전히 정축년 우역의 충격에서 극복한 상태였습니다.

농림축산식품부는 28일 경기 양주시의 돼지농장에서 아프리카돼지열병 의심 신고가 들어왔다고 밝혔다. [사진 한돈자조금]

농림축산식품부는 28일 경기 양주시의 돼지농장에서 아프리카돼지열병 의심 신고가 들어왔다고 밝혔다. [사진 한돈자조금]

아프리카돼지열병으로 비상이 걸린 상황입니다. 1637년 우역이 횡행했을 때 조선에는 정축년(丁丑年)이라서 우역이 발생했다는 풍문이 돌았는데 공교롭게도 올해는 기해년(己亥年)입니다.

얼마 전 중국에서 시작된 조류독감으로 동아시아 모두 혼란을 겪은 적이 있는데, 교통과 무역의 발달로 국제 교류가 급증하다 보니 전염병의 국제화 역시 더 빈번해지고 있습니다. 조선 때는 대규모 전염병이 대개 30년에 한 번꼴이었다고 하는데, 최근 10년만 해도 조류독감, 메르스, 아프리카돼지열병 등을 겪고 있습니다. 최근 국회에서 방역청을 설치하자는 건의가 나왔는데, 적극적인 논의를 시작해볼 때가 아닐까 싶습니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이 기사는 김동진 『병자호란 전후 우역 발생과 농우 재분배 정책』, 김동진·유한상 『병자호란 전후(1636-1638) 소의 역병(牛疫) 발생과 확산의 국제성』, 황만기 『牛疫에 대한 지식인의 인식과 고뇌양상』을 참고해 작성했습니다.

.

.

[유성운의 역사정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