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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운의 역사정치] 임진왜란 후 한일관계를 푼 건 경제난 처한 대마도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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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대마도 번주 종의지(宗義智·소 요시토시)에게 소속된 포수(砲手)인데 도주가 매사냥을 나갔을 때 명령을 어긴 잘못이 있어 감옥에 갇혔습니다. 결박돼 배에 실어 보냈기 때문에 오긴 했습니다만 조선 땅은 이번이 처음으로 왕릉을 범한 것은 전연 모르는 일입니다.” (마다화지·麻多化之·27세)

1606년(선조 39년) 11월 17일 대마도에서 보낸 두 일본인을 국문하던 조선 조정은 큰 고민에 빠졌습니다. 사연은 이렇습니다.
정유재란 직후부터 대마도에서는 조선에 관계 정상화를 요청했고, 이에 소극적이던 조선은 1606년 8월 대마도에 사신을 보내 다음과 같은 요구 사항을 내걸었습니다.

①일본 국왕(도쿠가와 막부)의 명의로 공식서한을 보낼 것
②임진왜란 중 한양에서 왕릉을 훼손한 범인을 붙잡아 보낼 것

조선통신사 제3선도 [중앙포토]

조선통신사 제3선도 [중앙포토]

당시 조선에서는 대마도가 일본 정부에 요청하더라도 처리 과정에 오랜 시일이 걸릴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석 달 후 부산에 돌아온 사신은 의외의 답변을 전했습니다. 대마도 번주가 "그대로 하겠다"고 승낙한 것이죠. 더 놀라운 것은 이로부터 불과 20일도 채 지나지 않은 11월 8일, 대마도 번주 측이 왕릉을 훼손한 두 범인, 마고사구(麻古沙九·37세)와 마다화지를 데리고 조선에 들어온 것입니다. 일본 국왕의 인(印)이 찍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국서도 지참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일본 측에서 보낸 범인은 “자신은 진범이 아니다”라고 발뺌을 하고 있으니 다시 고민에 빠진 것이죠. 조선 측에서 봐도 마다화지라는 일본인은 불과 27세였는데, 10년 전 벌어진 왕릉 훼손의 주범이라고 보긴 어려울 것 같았습니다.

대마도의 아슬아슬한 줄타기

쓰시마 반쇼인. 역대 대마도 번주 소씨 일가의 무덤 [중앙포토]

쓰시마 반쇼인. 역대 대마도 번주 소씨 일가의 무덤 [중앙포토]

훗날 드러났지만, 이는 대마도의 위험천만한 도박이었습니다.
학계에선 왕릉 훼손범뿐 아니라 일본 국왕의 서신도 ‘가짜’라는 의견이 많습니다. 즉, 조선 조정의 요구에 맞추기 위해 급조한 것이라는 거죠.
일단 당시 대마도와 도쿄의 왕복 시간을 참작하면 조선에 국서를 가져온 시간이 지나치게 빨랐습니다. 또한 대마도가 들고 온 국서에 찍힌 인장도 훗날 도쿠가와 막부 측이 보낸 ‘진짜’ 국서의 양식과 달랐습니다.

조선은 일본 국왕이 요청하면 비로소 정식 사신을 보낸다는 원칙을 갖고 있었습니다. 피해자인 조선이 먼저 국교를 요청할 이유가 없다고 본 것이죠. 또한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부터 조선이 일본과 손잡을 수 있다는 의심을 해왔기 때문에 이 때문이라도 먼저 일본에 국교 재개를 요청할 순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마도에 관계를 정상화하고 싶으면 조선에 이를 요청한다는 일본 국왕의 국서를 갖고 오라고 한 것입니다. 고려 이래로 조선은 일본의 천황-막부라는 이원적 시스템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막부를 일본 국왕으로 인정했고 이에 따라 조선 국왕과 일본 막부는 동등한 자격으로 대우했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중앙포토]

도쿠가와 이에야스 [중앙포토]

1606년 조선은 도쿠가와 막부의 국서를 확인한 뒤 국교 재개를 진행하는데 이 모든 것이 대마도의 조작이었으니 그야말로 간 큰 도박을 한 것이죠.
예를 들어 1613년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들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천황가와 혼인을 한다는 이유로, 1614년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조선의 필묵을 구한다는 이유로 각각 사신 파견을 요청했는데 모두 대마도 번주의 독단적 ‘작품’이었습니다. 심지어 대마도 측은 조선을 움직이기 위해 규슈 지역에 피랍된 조선인 3만명이 귀국을 기다리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리기도 했습니다.

훗날 이 같은 조작은 모두 들통이 나서 대마도는 조선과의 외교 교섭권을 박탈당하고, 대마도 번주의 가신 일부가 처형되는 등 큰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대마도는 왜 국교회복에 적극적이었을까

쓰시마 이즈하라의 중심지에 있는 조선통신사 행렬을 묘사한 타일 벽화. [이즈하라=김태성 기자]

쓰시마 이즈하라의 중심지에 있는 조선통신사 행렬을 묘사한 타일 벽화. [이즈하라=김태성 기자]

대마도가 이렇게 위험천만한 일을 벌인 것은 그만큼 조선과의 관계 개선이 간절했기 때문입니다. 임진왜란 전부터 대마도 측은 전쟁에 부정적이었는데, 실제로 이로 인해 큰 피해를 봤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대마도에 군사 5000명을 동원하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일본 내에서 군소 번에 속하는 대마도로서는 무리한 숫자였습니다. 그래서 농민을 고용하거나 심지어 죄인들도 써야 했습니다. 이들이 전쟁에서 대거 돌아오지 않아 대마도는 전후 심각한 노동력 고갈에 시달리게 됐습니다.

게다가 조선에서 가까운 최전방 기지라는 이유로 30만 대군의 숙식을 제공하고 군량 보급도 책임져야 했습니다. 그야말로 대마도의 경제를 갈아 넣는 상황이 되다 보니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의 거제도를 주겠다고 달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전쟁에서 패퇴하면서 이는 '부도 어음'이 되고 말았죠. 이 때문에 전쟁 직후인 1599년엔 중앙 정부가 대마도에 쌀 1만석을 긴급히 보내줘야 할 정도였습니다.

조선통신사의 국내외 주요 여정지. [사진 국립해양박물관]

조선통신사의 국내외 주요 여정지. [사진 국립해양박물관]

하지만 무엇보다 큰 문제는 조선과의 무역 단절이었습니다.
섬 대부분이 척박한 산지인 대마도의 쌀 산출량은 연간 2만4000석 정도였습니다. 당시 번주(다이묘)들의 세력의 크기는 쌀 생산량으로 가늠했는데, 거대 다이묘는 수십만 석에서 100만석까지 달했기 때문에 대마도는 정말 미미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런 대마도였기에 조선과의 무역이 끊기면 예산 집행도 불가능할 정도로 곤란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정유재란이 끝난 1598년 말부터 도쿄에 알리지 않고 독자적인 사자를 보내 무역 재개를 요청한 것이죠. 1606년 조선 사신이 왔을 땐 호의를 사기 위해 이웃 지방까지 찾아다니며 1390명의 피랍 조선인을 모아 인계하는 성의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쓰시마 고쿠분지- 통신사 일행의 객관으로 사용했던 곳 [중앙포토]

쓰시마 고쿠분지- 통신사 일행의 객관으로 사용했던 곳 [중앙포토]

이런 대마도의 노력 등으로 1609년(광해군 1년) 약 20년 만에 국교 재개를 알리는 기유약조(己酉約條)가 체결됩니다. 대마도는 그토록 원했던 조선 무역을 독점하는 권리도 다시 인정받았습니다.

-대마도가 매년 파견하는 배는 20척, 그 중 특송선(정보전달 목적의 특별 선박)은 3척으로 한다.
-매년 조선 조정은 대마도 번주에게 쌀과 콩 100석을 내린다.
-조선 체류비로 대마도 번주 특송선에는 10일분을, 그 외엔 5일분을 지급한다.

조선 무역이 가져다 준 대마도의 번영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조선통신사 기록물' 1783년 변박이 초량왜관을 그린 '왜관도'.   조선통신사 기록물은 조선이 임진왜란이 끝난 뒤인 1607년부터 1811년까지 200여 년간 바쿠후(幕府, 무사정권)의 요청으로 일본에 12차례 파견한 외교사절에 관한 기록을 지칭한다. [연합뉴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조선통신사 기록물' 1783년 변박이 초량왜관을 그린 '왜관도'. 조선통신사 기록물은 조선이 임진왜란이 끝난 뒤인 1607년부터 1811년까지 200여 년간 바쿠후(幕府, 무사정권)의 요청으로 일본에 12차례 파견한 외교사절에 관한 기록을 지칭한다. [연합뉴스]

이후 결과를 지켜보면 대마도가 왜 그토록 위험천만한 도박까지 벌였는지 이해가 됩니다.

대마도는 조선과의 교역을 통해 동남아-일본-조선-중국을 잇는 중계무역상의 역할을 하며 짭짤한 수입을 거둡니다.
대마도는 국제 무역항이 있던 나가사키에서 후추나 단목 같은 동남아시아의 특산품을 사들인 뒤 조선에 되팔았고, 반대로 조선에서는 인삼과 중국산 비단이나 명주실인 백사(白絲)를 구매해 일본에 팔았습니다.

 서양과의 무역 거점이던 일본 나가사키항. 일본 화가 가와하라 케이의 작품. 가운데 부채 모양으로 생긴 섬이 네덜란드와 교역을 위해 인공으로 만든 데지마섬이다. 네덜란드 기가 올려져 있다. [중앙포토]

서양과의 무역 거점이던 일본 나가사키항. 일본 화가 가와하라 케이의 작품. 가운데 부채 모양으로 생긴 섬이 네덜란드와 교역을 위해 인공으로 만든 데지마섬이다. 네덜란드 기가 올려져 있다. [중앙포토]

한 연구에 따르면 양측의 교역이 한창이던 1684~1717년 대마도는 민간 무역만으로도 은 4만 6500관(174.4톤)의 이익을 거둔 것으로 확인되는데, 이는 연평균 1367관(5.1톤)에 해당합니다. 양국 무역이 절정이던 17세기 말에는 1684년에는 은 1065관, 1690년에는 2539관, 1691년에는 3577관으로 점점 증가했습니다.
이 무렵 일본 나가사키에서 통상을 허가받았던 네덜란드의 무역 규모가 은 3000관이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조선-대마도의 무역 규모가 꽤 컸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대마도의 번영은 무역을 재개시킨 소 요시토모의 손자 소 요시자네(宗義眞) 시대에 절정기를 맞았는데 당시 기록에 따르면 대마도의 연 수입은 종래의 쌀 2만4000석에서 10만석으로 약 4배가량 늘어나 있습니다. 이런 경제적 호황에 힘입어 대마도 번주 가문은 중앙의 유명 귀족들과 혼인을 하는 등 세력도 키워 나갈 수 있었습니다.

조선은 무엇을 얻었나 

 조선시대 유입된 일본 은화 [사진제공=한국담배인삼공사]

조선시대 유입된 일본 은화 [사진제공=한국담배인삼공사]

무역으로 이득을 본 것은 대마도뿐이 아니었습니다.

조선 역시 일본에 인삼을 수출해 벌어들인 은으로 중국에서 비단이나  백사(白絲)를 수입한 뒤 이를 일본 상인에게 되파는 중계무역으로 짭짤한 수익을 올렸습니다. 특히 중국이 17세기 후반에 해금(海禁) 정책을 쓰면서 일본은 중국 제품을 구하려면 조선을 통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조선의 무역 수익은 극대화됐습니다.

예를 들어 1670년 중국에서 백사 100근의 수입가는 은 60냥인데, 왜관에서 일본 상인에게 판매한 수출가는 160냥이었다고 합니다. 2.7배의 이익을 본 것이죠. 당시 조선이 중계무역으로 얼마나 큰 이득을 봤는지 알 수 있습니다.

조선 정부는 이 무렵 매년 일본에서 들어오는 은의 총액을 30~40만냥(11.3~15톤) 정도로 파악했는데 당시 경제 규모를 감안하면 대단히 많은 양이었습니다. 대부분 중국과의 무역에 투입됐지만 적지 않은 양이 조선에서 유통됐습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지방 관청들도 비축한 은을 무역 상인들에게 대출해주고 이자를 받아 재정을 확충했다는 기록이 『숙종실록』 등에서 발견될 정도입니다.

16~17세기 세계 제2의 생산량을 자랑했던 이와미 은광 [사진=일본 이와미 은광 홈페이지]

16~17세기 세계 제2의 생산량을 자랑했던 이와미 은광 [사진=일본 이와미 은광 홈페이지]

당시 조선에 은화 유통량이 크게 증대했다는 것은 숙종 4년(1678년 1월 24일)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에서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포(布·옷감)의 유통이 두절돼 물건의 매매가 오로지 은화에 의존하여, 연료, 채소와 같은 보잘것없는 물건까지도 반드시 은화가 있은 연후에 교역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대마도-부산-의주-만주로 이어지던 은의 유통로를 '실크로드(Silk road)'에 빗대 '은의 길(Silver road)'이라고 명명하기도 합니다.

대마도의 쇠퇴와 조선 상업자본도 내리막길 

 은을 제련하는 과정. [사진=일본 이와미 은광 홈페이지]

은을 제련하는 과정. [사진=일본 이와미 은광 홈페이지]

그러나 이러한 영화도 18세기 들어 차츰 쇠퇴하기 시작합니다. 몇 가지 요인이 겹쳤습니다.

첫째 무역 거래의 자본 역할을 했던 일본의 은(銀)의 생산량이 급감했습니다. 당시 일본은 남미에 이어 세계 제2위의 은 산출 국가였는데 17세기 후반부터 생산량이 감소해 곤란을 겪게 된 것이죠.

둘째 조선과 대마도 사이에 중요한 사업이었던 인삼 무역의 쇠퇴입니다. 인삼은 대마도가 조선에서 수입하는 물품의 약 20%가량을 차지했습니다. 그런데 일본의 제8대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자국 경제를 살린다는 명목으로 수입하던 물품의 국내 자급률을 높이기로 했습니다. 당연히 인삼도 타깃이 됐죠.

요시무네는 인삼을 국산화하기 위해 부산 왜관에 ‘약재질정관(藥材質正紀官)’이라는 관직을 마련해 인삼의 종자와 재배방법을 입수합니다. 수년간의 시행착오를 거쳐 결국 인삼 재배에 성공하게 되죠. 일본 경제와 의학계엔 큰 도움이 됐겠지만, 양국 무역엔 쇠퇴를 가져오면서 대마도에도 큰 타격을 줬습니다.

인삼 [중앙포토]

인삼 [중앙포토]

한때 연간 20만냥을 상회하던 일본의 은 수출은 1707년부터는 10만 냥 아래로 더 떨어질 정도로 무역은 가라앉았고, 이미 17세기 말부터 대마도에선 “무역 쇠퇴로 인해 조선통신사의 숙식을 제공하는 비용도 마련하기 어렵다”고 호소할 정도가 됩니다. 그래서 도쿄의 중앙 정부는 보조금을 주며 달래기도 하는데, 이런 대마도의 경제난은 훗날 조선통신사가 끊어지게 되는 한 원인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조선 역시 17세기~18세기 초반까지 누리던 일본 특수가 사라지게 됩니다. 그 여파로 중국과의 외교나 무역 경비 확보에 곤란을 겪었을 뿐만 아니라 한 때 상인들에게 은을 빌려줄 정도였던 지방 관청들도 곤궁해져 지방 재정 감소로 이어졌습니다. 또 일본에서 들어온 은을 자본으로 무역을 꾸리던 의주 상인들도 크게 위축되는 등 조선 경제 전반에 악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때 이후로 ‘은화가 시중에 넘쳐난다’는 표현은 더는 기록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조선 후기 일본에서 들어온 은(銀)의 규모. 이헌창 『조선시대 銀 유통과 소비문화』에서 인용. 은의 단위는 관(貫)

조선 후기 일본에서 들어온 은(銀)의 규모. 이헌창 『조선시대 銀 유통과 소비문화』에서 인용. 은의 단위는 관(貫)

지정학적 요인으로 한·일 관계의 파고가 가장 먼저 닥치는 대마도의 상황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최근 일본에 가는 한국 관광객의 감소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지역이 대마도라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으니까요. 대마도뿐 아니라 일본 주요 지방 도시들이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편으론 국내 산업도 큰 타격을 입고 있습니다. 특히 일본 관광 호조를 기반으로 급성장했던 여행사나 LCC(저가항공사)들이 직격탄을 맞았습니다. 일부 항공사들은 구조조정에 나서며 긴급경영을 외칠 정도입니다. 또 일본 물품을 수입해 온 무역업자들도 신음하는 중입니다.

김대중 정부 이래 꽃 피우던 양국의 민간 교류와 경제효과가 된서리를 맞은 지금 양국 어느 쪽도 승리자가 되긴 어려워보입니다.

대마도의 '진실'에 조선은 어떻게 대응했나

병자호란에서 남한산성에 갇힌 조선의 47일을 다룬 영화 '남한산성' .  [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병자호란에서 남한산성에 갇힌 조선의 47일을 다룬 영화 '남한산성' . [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다시 1606년 조선의 이야기입니다. 왕릉을 훼손한 범인이 가짜라는 걸 눈치챈 조선 조정은 어떻게 했을까요.
진위를 캘지 말지를 놓고 논의를 벌이다가 그냥 묻어두기로 결정합니다. 두 사람이 진범이 아니더라도 이들을 처형하고 종묘에 보고함으로써 일본 측의 사죄 의사를 알려지게 하는 것으로 매듭지었습니다. 나중에 벌어진 가짜 국서 파문 때도 마찬가지로 적당히 넘어갔습니다. 비록 일본의 요청으로 시작되긴 했지만 어렵게 찾아온 기회를 날려버리지 말자는 공감대가 작용한 것이죠.

또 국경의 북쪽에서 여진족(후금)의 동태가 불온해지면서 남쪽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명분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1606년 일본에 간 사신단에게 맡겨진 임무 중 하나는 오사카에서 조총 500자루를 구매하는 일이었습니다. 후금과의 충돌에 대비하기 위한 무기 구매였던 것이죠.

북인

북인

동시에 두 개의 외교 전선(戰線)을 만들면 안 된다는 것이 삼국시대 이래 한반도 왕조 국가들이 터득한 지혜였습니다. 또 당시 정권을 잡은 세력은 주요 당파 중 명분과 이념보다 실리와 무력(武力)을 중시해 온 북인(北人)이었습니다.
가짜 국서와 가짜 범인을 눈감아주거나 임진왜란이 끝난 지 10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일본에서 무기를 사들인 데는 이같은 정치적 상황도 반영된 것으로 보입니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이 기사는 이헌창 『조선시대 銀 유통과 소비문화』, 권내현 『17세기 후반~18세기 전반 조선의 은 유통』, 나카오 히로시 『조선통신사-에도 일본의 성신외교』를 참고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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