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운의 역사정치] DJ "130만명"에 YS도 맞불…정치권 '100만 동원' 집착사

중앙일보

입력 2019.10.13 05:00

수정 2019.10.27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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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서울운동장에서 우익 주도로 열린 3.1절 [자료=국가기록원]

 “기자와의 회견은 오늘이 처음이다. 가장 섭섭한 것은 잃어버린 주권을 찾고 새 국가를 건설하는 이 마당에 언론기관이 정확한 기사를 보도해야 하는데… 사실을 왜곡하거나 사실을 발표하지 않고 또 없는 사실을 만들어 발표하는 것은 언론기관으로서 자격이 없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1946년 3월 4일자 『동아일보』 1면에는 독립운동가 김규식 선생의 분노 어린 인터뷰 기사가 실렸습니다. 기사 제목도 “비통한 태도로 신문계에 경고!”였습니다.

[유성운의 역사정치]

“3월 1일로 말하면 우리가 28년 전에 그 어려운 환경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를 불러 왜적의 총칼에 생혈(生血)을 뿌렸는데 도탄 가운데 있다가 28년 만에 비로소 27주년의 기념을 하는데 좌우가 통일하지 못한 것은 유감된 일이다.”
 
김규식 선생의 분노는 사흘 전 열린 3ㆍ1절 행사에서 비롯됐습니다. 행간을 보면 좌ㆍ우익이 따로 기념행사를 가졌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사를 더 읽어보면 분노의 ‘진짜’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서울운동장에는 가히 모든 시민이 총동원하였다 할 수 있으며 외국인 기자는 이것을 세계에 선전하기 위해 분주하였고, 미군정 당국이 행정을 지금 우리 손에 맡기는 데 난색을 보이면서도 행사에 여러 가지로 물질적 원조를 해주는 것이 우리의 독립을 원하는 단적인 증거가 되는데도 불구하고 국내 신문의 대부분이 이 자연적 민족적 지성의 발로를 기사자료로서 거부하였다는 것은 그 의도가 어디에 있는 것인가. 경고하는 동시에 만일 나에게 잘못이 있다면 무릎을 꿇고 호소하겠다.”


독립운동가 김규식(왼쪽)은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총장으로서 파리강화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프랑스로 갔다. 1919년 8월 6일 파리를 떠나며 한 고별 연설 내용이 담긴 프랑스 일간지 '라 랑테른'의 기사(오른쪽) [재불사학자 이장규씨 제공=연합뉴스]

해방 후 첫 3·1절…좌파는 남산, 우파는 서울운동장으로

해방 후 처음으로 치러진 1946년 3ㆍ1절 행사는 남산과 서울운동장에서 따로 치러졌습니다. 좌익은 남산공원과 파고다공원에서, 우익은 서울운동장과 보신각에서 각각 행사를 연 것입니다. 경축일이었지만 해방 이후 좌우로 분열된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난 '참사'에 가까운 상황이 펼쳐진 것이죠.
이후 6·25 전쟁 전까지 남산과 서울운동장은 좌·우익의 무대가 됩니다. 좌익은 남산에서 모스크바3상회담 지지, 신탁 찬성 시위를 벌였고, 우익은 서울운동장에서 모스크바3상회담 반대 및 신탁 반대 시위를 열며 제각기 세력 과시를 했습니다.

 
당시 38선 이북은 말할 것도 없고 이남에서도 좌익의 조직력이 우익을 능가했습니다. 좌익 세력은 1945년 9월 이미 서울에서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할 정도로 조직력을 과시한 반면 우익 측은 1945년 12월에야 귀국하는 김구ㆍ이승만이 올 때까지 그야말로 지리멸렬한 상황이었죠.
 
1948년 26세 나이로 주한 미대사관 부영사로 왔던 그레고리 헨더슨은 1968년 저서 『소용돌이의 한국 정치』에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청년 그룹의 대부분은 정치성을 띠고 선동적이었으며 좌파가 선두를 달렸다. 조선 공산주의 청년동맹에서 파생한 것들이었다. 그들은 인민위원회라는 이름 아래 보안대의 일부로 결성되었으며 닥치는대로 일본인의 무기를 수거하고 경찰서를 점거했으며 멋대로 순찰을 돌고 기부금을 강요했다. 이들은 남한 좌익 진영의 최강의 무기였으며 선전·선동의 하수인이었다.”
 

1946년 서울운동장에서 우익 주도로 열린 3.1절 [자료=국가기록원]

1946년 3ㆍ1절 행사에서도 이러한 차이는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남산에는 10만명이, 서울운동장에는 3만명 가량이 모였다고 하니, 좌익 쪽이 약 3배가량 많은 인원을 동원한 것이죠.
 
당시 좌익 측은 조선공산당이 운영한 『해방일보』를 비롯해 『조선인민보』 등을 확보하고 있어 남산 행사를 대대적으로 선전했던 반면, 『동아일보』 등에서는 ‘기계적 중립’을 택해 서울운동장 행사를 별도로 소개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중도우파 진영의 지도자였던 김규식 선생이 분통을 터뜨리며 “만일 나에게 잘못이 있다면 무릎을 꿇고 호소하겠다”며 인터뷰를 마친 것이죠.
 
특히 좌익에서 동원한 ‘10만명’이라는 숫자는 대단히 충격적인 수치였습니다. 1946년 서울의 인구는 약 120만명이었으니 지금의 서울 인구를 참작하면 대략 100만명이 나온 셈이죠. 열악하기 그지없던 해방 직후의 교통ㆍ통신 인프라를 고려하면 그러한 동원력은 우익 측에게 충격 내지 좌절감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이날 특별히 실의에 빠진 사람 중에는 이북 출신 청년들이 있었습니다. 38선 이북에서 공산세력을 피해서 내려온 이들인 만큼 아마도 일종의 공포감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우파의 완패로 끝난 3·1절 행사 후 서울 중구 북창동 대송여관에 평안도 출신 청년들이 모여 대책을 논의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38선 철폐를 요구하는 국민대회를 열기로 결의했습니다. 

1946년 서울운동장에서 우익 주도로 열린 3.1절 [자료=국가기록원]

이튿날 이들은 평양 민족주의계 거물인 조만식의 오른팔로 서울에서 활동하던 조선민주당 부당수 이윤영을 찾아가 설득했고, 그 외에도 이승만과 이종형 대동신문 사장 등으로부터 거금의 후원금을 얻어냅니다.  
 
불과 사흘 뒤인 3월 5일, 서울운동장에서 38선 철폐요구 국민대회가 열렸습니다. 임시정부의 외교부장인 조소앙이 축사로 시작된 가운데 행사엔 2만명 가량이 모였습니다. 숫자는 3ㆍ1절보다 적었지만, 이북 출신 청년단이 주최한 행사에서 이 정도 규모가 왔다는 점에서 우익 측을 매우 고무시켰죠.  
 
이날 행사는 서울 정동에 있는 소련 영사관에 가서 돌을 던지고, 조선공산당 본부와 좌익 계열의 언론사를 습격하는 시위로 확산했습니다. 그리고 이 행사를 주도한 문봉제를 비롯한 서북 지역 청년들이 훗날 서북청년단의 모태가 됩니다. 
 
그레고리 헨더슨은 『소용돌이의 한국 정치』에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공산 청년동맹의 발호, 미·소 냉전체제, 실업자 사태, 정치에 대한 지향성 등이 우파 청년단체들을 탄생시켰다.… 좌우 폭력대결과 혼란이 지속되는 동안 그들은 공포와 무법을 구가할 수 있었으며 한국전쟁 후 사회가 안정되면서 비로소 쇠퇴했다.”
 

서북청년단 완장.

  

[유성운의 역사정치]

DJ와 YS 100만 동원의 시대를 열다 

1987년 11월 29일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1백여 만명의 인파가 모인 가운데 유세를 가진 김대중 평민당 후보가 두팔을 들어 청중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중앙포토]

군중 동원의 정치학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87년 대선입니다. 약 30여년에 걸친 군부 정권이 종식되면서 선거운동이 자유로워졌고, 매스미디어가 발달하면서 ‘대중 동원=정통성’의 척도로 자리 잡은 것이죠.
1987년 11월 30일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김대중 평민당 후보의 유세에는 130만명의 인파가 모여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가로 1300m, 세로 180m의 광장과 일대 10차선 차도, 그리고 광장을 향한 주요 도로와 한강둑까지 청중이 가득 메웠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에 자극받은 정치권은 경쟁에 들어갑니다. 김대중 후보의 이 유세가 열린 바로 다음 토요일인 12월 5일엔 각 당의 후보가 모두 100만명 이상의 청중 동원을 자신하며 대규모 행사를 기획했습니다. 특히 김대중 후보와 정통 민주 후보라는 라이벌 의식이 강했던 김영삼 후보는 똑같이 서울에서 열어 맞불을 놓기도 했습니다.  
각 언론에서 ‘주말 대회전’으로 기록한 이 날 각 당은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부산, 서울, 광주에서 각각 100만~300만명의 청중 동원을 내걸었고, 다소 당세가 약했던 김종필 후보의 공화당만 대전에서 50만명을 동원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언론에선 이날 하루 동안 300만명가량이 찾아왔으며 선거 사상 최대의 군중 동원이라고 기록했습니다.  
 

1989년 12월 5일 김영삼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5일 여의도 유세에서 전육참모총장 정승화씨와 김상현씨의 손을 잡고 군중들의 환호에 손을 들어 답례하고 있다. [중앙포토]

다만 양 김 씨의 대결로 관심을 모았던 1992년 대선에선 이같은 군중 동원이 상대적으로 덜했는데, 그것은 지나친 선거과열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스스로 자제하겠다는 입장을 내놨기 때문입니다.
 
”여의도 광장에서 백만명 단위의 대규모 유세를 할 경우 선거 자체를 과열시킬 뿐만 아니라 수도 서울의 교통을 마비시켜 시민들에게 큰 불편을 드릴 것이 분명하다. 민자당은 다른 당에서 대규모 여의도 유세를 가지더라도 ‘찾아가는 소규모 유세’만을 하겠다.” (1992년 12월 11일, 김영삼 후보)
 
그러자 김대중 후보 측도 이날 마포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13일 예정된 여의도광장의 대규모 집회를 취소하겠다고 밝혔습니다.  
 

1987년 노태우 후보의 여의도 유세

그렇다면 100만명 군중 동원의 불을 붙인 1987년 11월 김대중 후보의 여의도 광장에는 실제로 얼마나 왔을까요.  
당시 기사를 보면  “주최 측은 300만명, 경찰 50만명 주장”이라는 내용이 덧붙여져 있는 걸 보면 이때도 추산을 놓고 견해가 엇갈렸던 모양입니다. 다만 요즘 유행하는 페르미 기법을 적용하면 여의도광장엔 35만명에서 70만명가량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인근 도로까지 사람이 들어찼다고 감안해도 100만명은 넘기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100만'이 가진 서사의 힘

영화 '적벽대전'의 한 장면

100만이라는 숫자는 특별한 서사의 힘을 갖습니다.
동양에서 100만명이라는 숫자는 실제 규모를 넘어선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상대를 압도하는 위력, 천하를 제패했다는 자신감, 민심을 확보했다는 정통성 등을 의미하는 숫자처럼 인식될 때가 많습니다.
 
『삼국지연의』의 백미로 꼽히는 적벽대전은 유비와 손권의 연합군이 조조의 100만 대군을 물리치는 내용입니다. 실제 진수가 쓴 정사(正史) 『삼국지』에서는 100만이 아닙니다. 조조가 손권에게 보낸 편지에는 ”근래 천자의 말씀을 받들어 죄지은 자(유표)를 처벌하였소. 깃발이 남쪽을 가리키니 유종이 손을 모았소. 지금 수군 80만 명의 무리를 다스려서 바야흐로 장군과 함께 오에서 만나 사냥하려고 하오. “라고 보냈습니다. 이를 문학가였던 나관중이 100만명으로 바꾼 것이죠. 100만이라는 의미가 특별했기 때문입니다. 
 
조조 또한 '80만'을 언급한 것은 정치적 수사에 불과했습니다. 실제로 역사가들은 당시 조조군의 군세는 16만~20만 남짓이며, 이 중 8만명 가량은 적벽대전 직전 형주를 정복하며 흡수한 유표군이라고 봅니다. 
 

영화 '적벽대전'의 한 장면

우리 역사에서는 수나라의 제2차 고구려 침공 때 무려 113만명이 동원됐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는 『수서(隨書)』에 기록된 수치입니다. 일각에서는 실제로 113만명의 군사가 동원됐다고 보는 반면 과장됐을 가능성을 지적하는 신중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신중론 측에선 대개 20~30만명 정도로 보고 있으며, 최대 60만명을 넘지 않았으리라고 봅니다.
 
고구려 원정은 거리가 멀어 병참 등에 필요한 인원이 군사의 2배 가량 필요했다고 합니다. 만약 113만의 군사가 동원됐다면 실제론 대략 350만명이 움직였다는 것이죠. 당시 수나라의 인구가 4700만명 정도로 추산되고, 군대 동원이 가능한 것은 청장년층에 한정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비현실적이라는 것이죠. 수양제의 침공은 농번기에 돌입하는 음력 3월이었는데 350만의 젊은이가 전선으로 갔다면 농업을 비롯한 국가 산업이 거의 마비됐을 상황입니다. 
 
수양제의 실패 이후 있었던 당태종의 고구려 원정 때 동원한 병력이 10만명 안팎이라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수서(隨書)』를 작성한 당나라 집권 세력이 자신들의 건국을 정당화하기 위해 수양제의 무리한 군사정벌을 부각하는 차원에서 숫자를 높였을 수도 있습니다.
 
참고로 서양사에서는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황제가 그리스를 침공할 때 170만명을 동원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만 현대의 연구자들은 약 30만명 정도로 봅니다. 이유는 위와 비슷합니다.
 

서초동과 광화문이 던지는 물음표

검찰 개혁을 촉구하고 조국 법무부 장관을 지지하는 집회가 5일 서울 서초동에서 열렸다. [뉴스1]

지난달 28일 서초동 대검찰청 앞에서 열린 조국 수호 집회에서 주최 측이 200만명을 주장하고,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이를 강조한 것은 역시 100만명이라는 정치적 서사의 의미를 고려한 행위가 아니었을까요. 그러자 이 숫자에 자극받은 보수 진영은 바로 맞불 집회를 광화문광장에서 열어 더 많은 군중을 동원하는 위력을 선보였습니다.
해방 직후 좌익과 우익이 남산과 서울운동장에서 3ㆍ1절 행사를 따로 열며 세를 과시했던 장면이 오버랩되는 장면입니다.
 

조국 법무부 장관의 사퇴를 요구하는 보수단체 집회가 3일 서울 광화문광장~서울역에서 열렸다. ‘반(反) 조국’ 및 문재인 정권 규탄을 내건 이날 범보수 세력의 집회에는 수많은 시민들이 몰렸다. 임현동 기자

 
다시 삼국지의 시대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학자들은 적벽대전에서 100만명이 싸운 것은 허구로 보지만 위ㆍ촉ㆍ오 삼국이 실제로 수 십만명 단위의 군사를 동원했다고 봅니다. 당시 인구나 생산력을 고려하면 매우 많은 숫자입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그것은 당시가 지극히 난세였기 때문입니다.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없었던 농민, 황건적의 잔당, 유랑자 등이 대거 군에 가담했습니다. 관도대전·적벽대전·이릉대전 등을 만든 조조, 유비, 손권, 제갈량, 주유, 관우 등의 영웅담이 풍미하지만, 현실의 삶은 비참했으며 일반 백성들의 삶은 하루하루가 피폐했을 뿐입니다.
한나라 때 5500만명에 달했던 중국의 인구가 삼국시대 후 1600만명에 불과했다는 점은 그런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래서 삼국시대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시선은 매우 싸늘한 편입니다. 『삼국지연의』와 다르게 역사 교과서에서 짧게 다뤄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서초동이나 광화문이나 모인 시민들은 모두 분노해서 나왔다고 말했습니다. 정치에 대한 불신과 피폐해진 삶에 대한 분노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100만명, 200만명이 동원된 것이야말로 한국 정치인들의 부끄러움으로 남아야 하지 않을까요.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이 기사는 그레고리 헨더슨 『소용돌이의 한국 정치』, 이중톈 『삼국지강의』를 참고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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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운의 역사정치]